나는 감정이란 즉각적인 반응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나는 감정이란 상황에 따라 훈련된 반응이 드러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니까 상황에 따라서 드러나는 감정적인 반응은 일정한 훈련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낳는데, 나는 적합한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었던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으로부터 상황에 적합한 감정적인 반응을 확인할 수 있다고 믿는다. 말이 조금 어려워졌는데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감정은 훈련되어야 하고 훈련된 감정이 표출되는 지점은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순간이 된다면 더 좋을 것 같다.
상황에 따라 나타나는 감정은 즉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오랜 시간 동안 훈련된 결과이다. 예를 들어, 끔찍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감정이 끔찍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처럼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감정이 나타나는 과정을 주의 깊게 살펴볼 수 있다면, 반응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자연스럽게 되어 버린 시간을 포함한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감정에 대한 철학자들의 연구는 스피노자에서 처음 나타난다. 나는 그의 말을 신뢰하는데, 왜냐하면 철학자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때에는 이전 철학자들의 연구를 면밀히 연구한 이후 이전 철학자들을 비판하는 가운데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에티카』에서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감정의 본성과 그 힘에 관하여, 또 감정을 제어할 때 정신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관하여 명확하게 밝혀낸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아무도 없다." (추영현 옮김) 스피노자는 『에티카』"3부 감정의 기원과 그 본성에 관하여"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감정[정서]이란 신체의 활동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거나 혹은 촉진하거나 억제하는 신체의 변양(變樣=변체=변화상태)이며, 동시에 그런 변양[자극상태]의 관념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만일 우리가 이런 변양의 어느 충분한 원인일 수 있다면 이 경우 나는 감정을 능동(能動)으로 해석하고, 그 이외의 경우에는 수동(受動)으로 해석한다." (추영현 옮김)
스피노자는 감정이란 능동과 수동의 상태로 나뉘며 신체의 변화상태인 동시에 변화상태의 관념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감정은 자극을 통해서 발생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은 신체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동시에 머릿속에서 그려진 모습을 통해서 드러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감정은 수동적인 또는 외부의 자극만으로 판별되어서는 안 되는 것임이 분명하다.
《글래디에이터》에는 두 명의 유명한 황제가 나온다. 스토아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그의 아들 콤모두스인데, 역사를 바탕으로 한 각색이 영화를 더 매력적인 이야기로 느끼게 만든다. 기번은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잔혹한 콤모두스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는데, 콤모두스의 처음과 달라진 지점을 기술한다.
“콤모두스는 흔히 말하는 것처럼 피에 굶주린 사나운 성질을 타고 태어난 것도, 유아기부터 잔인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사악하다기보다는 유약한 성질을 타고났다. 그는 단순하고 소심했기 때문에 측근들의 말을 무조건 믿었는데, 그 측근들이 그의 정신을 서서히 타락시켰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따라 잔인한 행동을 저질렀지만 그것은 점점 습관으로 굳어 갔고 마침내는 잔인성이 그의 영혼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에드워드 기번, 윤수인·김희용 옮김)
황제가 된 이후에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스스로 비판할 필요가 없는 자리에 놓이게 되자, 콤모두스의 훈련받지 못한 감정은 극악무도한 행동으로 나타난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이 이성으로, 이성에서 정신으로, 정신에서 절대정신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정신이 역동적인 정신 스스로가 되는 지점을 인지하는 과정을 그린다. 헤겔에 의하면, 무엇인가를 인지하는 과정은 타자가 있어야 가능하다.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마다의 본질은 타자로서 나타난다. 자기 본질이 자기 바깥에 있는 것이다." (김양순 옮김)
자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타인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자신의 삶 속에서 느끼는 감정들은 주관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자신의 주관으로 타인을 평가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는 과정은 객관적인 정보의 획득에서 거리가 생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텍스트를 통해서 이야기에 대해서 배우고, 텍스트를 통해서 인간의 감정을 익히는 과정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리쾨르에 의하면 텍스트는 그 자체로 객관적이기 때문이다.
헤르만 헷세의 「공작 나방」은, 에밀과 하인리히 모어 사이에서 발생한 유년 시절의 이야기를 다룬다. 에밀은 질투라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자신이 느낀 열등감이나 상대에 대한 우월한 감정은 상대를 망가뜨리는 잔인함으로 표현한다. 자신이 속한 세계에 누구와도 공감된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모어는 자신을 투영한 존재를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
수업을 진행하면서 겪는 어려움은 에밀이나 모어의 감정 상태를 학생들이 읽어내지 못하는 점에서 드러난다. 학생들은 냉혹하고 잔인한 에밀과 자신의 존재를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서 찾아가는 과정에 놓인 모어가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두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 집중할 수 있도록 돕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제한된 시간 안에서 이해를 돕기 위해 애를 쓰다 보면, 두 사람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 행동을 통해서 드러나는 모습을 이해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느낀다.
무엇 때문일까? 겪어보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감하는 능력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훈련하는 과정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내가 독서 토론 수업에서 인간의 감정에 대해서 다루는 작품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감정은 텍스트를 통해서 배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감정에 대해서 익히는 과정은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감정을 주의 깊게 바라볼 수가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 감정은 감정을 익히는 과정이 요구된다.
- 좋은 이야기를 통해서 훈련되는 과정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