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비안 광 Aug 27. 2021

나는 그냥 걷고 싶을 뿐이다

오늘 새벽부터 일이 있었다. 양치를 하고 어푸어푸 고양이 세수를 했다. 선크림을 덕지덕지 바르고 옷을 챙겨 입고 나가는데 갑자기 취소되었다.

다시 들어가서 잘까 하다가 번들거리는 선크림이 찝찝하고 얼굴에 바른 게 아까워서 차에 가방을 던져 놓고 걷기로 했다. 아침저녁으로 피부에 와닿는 바람의 촉감이 너무 좋다. 보들보들하다. 시원하기까지 하다. '이러다 죽는 거 아냐?' '무슨 날씨가 이렇게 더워.' 헉헉거리던 때가 언제였는지 입추가 지나니 확실히 다르다.



그래도 땀은 흐른다. 기분 좋은 땀이다.



저 앞에 낡은 유모차를 끌고 가시는 분이 보인다. 뒤태가 안면이 있는 분이다. 모른 척 지나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큰어머이~~일찍 나오셨네예?"

"오야, 니도 일찍 나왔나?"

"식사는 하시고 나오셨습니꺼?"

"큰아버지랑 퍼뜩 한 그릇 먹고 나왔다."

"하하 빨리 드셨네예. 저는 아침밥 때문에 앞서 가께예."

"오냐오냐, 어서 가그래이."



인사를 하고 경보 선수처럼 후딱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한쪽에는 작은 강이 흐르고 한쪽에는 초록 초록한 벼들이 잘도 자라고 있다. 멍하게 머리를 비우고 빠른 걸음으로 계속 걸었다. 트럭이 한 대 달려온다. 나는 풀더미로 살짝 비껴 섰다. 트럭이 멈춰 선다. 이번에는 남편 후배의 어머니다.

"운동하러 나왔나?"

"아~ 예. 어머이ㅎㅎ벌써 들에 나가십니꺼?"

"요새는 더워서 일찍 서둘러야 된다."

"그지예. 더워도 너무 덥지예. 고생이 많으십니더."

"나이 들어서 이런 거라도 안하모 심심해서 몬산다."

"맞습니더. 건강 잘 챙기시고예."

"그래, 들어가라이~~"



나는 AI처럼 식사와 날씨를 돌려막기하듯 안부를 묻는다. 딱히 할 말도 없을뿐더러 뻔한 말들이 전부다. 어느새 이 작은 시골 마을에 동화되어 나를 외지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어른들이 감사하긴 하다. 그렇지만 가끔은 조용히 걷고 싶을 때도 있다. 조금은 불편한 장애물이다. 나는 또 어디선가 나타날 동네 어른을 피해 잽싸게 뛰었다. 미지근한 물로 땀을 씻어내고 얼굴에 발라 놓은 선크림도 뽀드득 씻었다.

어머님이 박을 사왔다. 요즘에는 껍질을 깎아놓고 파는 박도 많은데 꼭 저렇게 완제품을 가지고 온다. 하긴 생선도 장만하지 않고 사 오는 양반인데..

박껍질이 생각보다 단단하고 질기다. 껍질을 벗길 땐 고무장갑을 꼭 껴야 한다. 안 그러면 칼이 엇나가서 베일 수도 있다. 아니나 다를까 칼이 손목으로 튀었다. 고무장갑이 아니었으면 아침부터 피 볼 뻔했다. 박껍질에다 씨까지 쓰레기가 한 무더기다.



고무장갑을 벗고 흐르는 물에 박을 살살 씻어주고 듬성듬성 잘라 냄비에 수북이 쌓는다. 물을 반쯤 잠기게 붓고 자글자글 끓인다. 조선간장을 두어 바퀴 두르고 참기름을 한 세 바퀴쯤 둘러준다. 얼린 홍합을 무심하게 툭 던져넣고 다져논 마늘과 나의 사랑 땡초를 넣는다. 목이 긴 나무 숟가락으로 휘휘 저어가며 볶아주다가 깨소금을 한줌 때려 넣고 불을 끈다. 이게 박나물볶음인지 박국인지 모를 정도로 자작하게 물이 생겼다. 얼린 홍합이 자기 몫을 톡톡히 해낸 국물이랑 박을 듬뿍 떠서 한 입 가득 오물거리면 아삭하면서도 그닥 씹을 게 없다. 푹 익은 무 같기도 하다. 오늘 아침도 야무지게 뚝딱 해치웠다.

불룩한 내 뱃속에는 언제 나올지 모르는 셋째가 있다.(하하하)

매거진의 이전글 값어치 있는 반항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