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벽부터 일이 있었다. 양치를 하고 어푸어푸 고양이 세수를 했다. 선크림을 덕지덕지 바르고 옷을 챙겨 입고 나가는데 갑자기 취소되었다.
다시 들어가서 잘까 하다가 번들거리는 선크림이 찝찝하고 얼굴에 바른 게 아까워서 차에 가방을 던져 놓고 걷기로 했다. 아침저녁으로 피부에 와닿는 바람의 촉감이 너무 좋다. 보들보들하다. 시원하기까지 하다. '이러다 죽는 거 아냐?' '무슨 날씨가 이렇게 더워.' 헉헉거리던 때가 언제였는지 입추가 지나니 확실히 다르다.
그래도 땀은 흐른다. 기분 좋은 땀이다.
저 앞에 낡은 유모차를 끌고 가시는 분이 보인다. 뒤태가 안면이 있는 분이다. 모른 척 지나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큰어머이~~일찍 나오셨네예?"
"오야, 니도 일찍 나왔나?"
"식사는 하시고 나오셨습니꺼?"
"큰아버지랑 퍼뜩 한 그릇 먹고 나왔다."
"하하 빨리 드셨네예. 저는 아침밥 때문에 앞서 가께예."
"오냐오냐, 어서 가그래이."
인사를 하고 경보 선수처럼 후딱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한쪽에는 작은 강이 흐르고 한쪽에는 초록 초록한 벼들이 잘도 자라고 있다. 멍하게 머리를 비우고 빠른 걸음으로 계속 걸었다. 트럭이 한 대 달려온다. 나는 풀더미로 살짝 비껴 섰다. 트럭이 멈춰 선다. 이번에는 남편 후배의 어머니다.
"운동하러 나왔나?"
"아~ 예. 어머이ㅎㅎ벌써 들에 나가십니꺼?"
"요새는 더워서 일찍 서둘러야 된다."
"그지예. 더워도 너무 덥지예. 고생이 많으십니더."
"나이 들어서 이런 거라도 안하모 심심해서 몬산다."
"맞습니더. 건강 잘 챙기시고예."
"그래, 들어가라이~~"
나는 AI처럼 식사와 날씨를 돌려막기하듯 안부를 묻는다. 딱히 할 말도 없을뿐더러 뻔한 말들이 전부다. 어느새 이 작은 시골 마을에 동화되어 나를 외지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어른들이 감사하긴 하다. 그렇지만 가끔은 조용히 걷고 싶을 때도 있다. 조금은 불편한 장애물이다. 나는 또 어디선가 나타날 동네 어른을 피해 잽싸게 뛰었다. 미지근한 물로 땀을 씻어내고 얼굴에 발라 놓은 선크림도 뽀드득 씻었다.
어머님이 박을 사왔다. 요즘에는 껍질을 깎아놓고 파는 박도 많은데 꼭 저렇게 완제품을 가지고 온다. 하긴 생선도 장만하지 않고 사 오는 양반인데..
박껍질이 생각보다 단단하고 질기다. 껍질을 벗길 땐 고무장갑을 꼭 껴야 한다. 안 그러면 칼이 엇나가서 베일 수도 있다. 아니나 다를까 칼이 손목으로 튀었다. 고무장갑이 아니었으면 아침부터 피 볼 뻔했다. 박껍질에다 씨까지 쓰레기가 한 무더기다.
고무장갑을 벗고 흐르는 물에 박을 살살 씻어주고 듬성듬성 잘라 냄비에 수북이 쌓는다. 물을 반쯤 잠기게 붓고 자글자글 끓인다. 조선간장을 두어 바퀴 두르고 참기름을 한 세 바퀴쯤 둘러준다. 얼린 홍합을 무심하게 툭 던져넣고 다져논 마늘과 나의 사랑 땡초를 넣는다. 목이 긴 나무 숟가락으로 휘휘 저어가며 볶아주다가 깨소금을 한줌 때려 넣고 불을 끈다. 이게 박나물볶음인지 박국인지 모를 정도로 자작하게 물이 생겼다. 얼린 홍합이 자기 몫을 톡톡히 해낸 국물이랑 박을 듬뿍 떠서 한 입 가득 오물거리면 아삭하면서도 그닥 씹을 게 없다. 푹 익은 무 같기도 하다. 오늘 아침도 야무지게 뚝딱 해치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