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세월 숱한 택시를 랜덤으로 잡아타는 동안
한 번도 위험한 일이 없었다는 것은 기적이다.
그땐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기적이었음을.
그런데 딱 한 번, 무서웠던 적이 있다.
유일한 한 번이었는데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껴
수 년뒤 떠나던 날까지 그 구간은 걷기만 했다.
늦은 저녁
모스크바의 겨울밤은 깜깜하고 코가 차가웠다.
우리 학교는 크렘린, 즉 크레믈 근처에 있는데
내가 타는 지하철까지의 거리가 무척 애매하다.
트롤리가 아주 가끔 다녔지만 근처도 아니었다.
학교 연습실이 닫힐 때 나왔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발걸음이 무거웠다. 날씨도 추웠고.
웬만하면 걷겠는데 천리길 같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손을 뻗어 보았다. 이 도로의
끝에 내가 원하는 메트로 역이 있으니 누구든
태워만 준다면 방향은 무조건 같을 것이었다.
웬일로 좋은 차
즐비한 차들 사이에 딱 봐도 무거운 수입차가
내 앞으로 왔다. 이 차는 설 리 없다고 생각해
그냥 비키려는데 나를 태워주려 선 것이었다.
참 별 일이네. 어떤 언니는 택시 잡을 때마다 꼭
벤츠만 선다고 막 자랑하던데(외모.. 음.. 생략)
내겐 항상 최고 후진 러시아 차만 선단 말이다.
그런 나에게 이런 날도 있다니 믿어지지 않지만
앞 문을 열고 목적지를 말하자마자 타라고 한다.
외모가 마치 동양인과 비슷했다. 순수 러시아인은
절대 아니었다. 뒷 문을 열고 앉자 역시 편안했다.
'아, 다행이다. 너무 힘들었는데!'
라고 생각했다. 차주가 ㄱ소리 하기 직전까지는.
양심은 어디에
어디에서 오는 길이냐길래 학교에서 연습하다
돌아가는 길이라고 하자 이런저런 정상적인
질문들을 이어나가서 그냥 다 대답해 주었다.
어차피 탄 차에서 저 평범한 질문을 무시해야
할 이유도 없었고, 길지도 짧지도 않은 구간이
엄청나게 막히고 있어서 빨리 도착하기 글렀다.
그렇게 한동안 보통의 질문만 하다가,
이 젊은 남자가 선을 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일일이 적을 가치도 없지만 뭐 이런 것 말이다.
자기도 악기를 배우고 싶은데 레슨 받을 수 있냐
연락처를 달라, 배우고 싶다 이런 쓸데없는 말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만일 한국인이 그런다면 무척 당황하겠지만
러시아에서는 유연히 넘길만한 레벨이랄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 나는 결혼해서 아내랑 자녀가 넷이 있는데
둘은 두바이로 유학 보냈어요.
- 아, 그렇군요.
- 아내도 두바이에 왔다 갔다 해요.
- 아, 네.
- 그러니 당신과 잘 만날 수 있어요.
이런 미친ㄴ을 봤나. ㅁㅊㅅㄲ 욕이 나올 법
했으나 할 말을 잃어 대꾸하지 않고 있었다.
아 물론, 유부남이 총각행세를 하는 것도 나빠.
그렇지만 이건 또 뭐야. 애가 넷이라고 하면서
만날 수 있냐고 묻더니 무려 조르는 것이었다.
살다 살다 이렇게 철면피인 남자는 처음 봤다.
희대의 ㄱ소리
경제적으로 얼마큼의 여유가 있는지 얘기한다.
미친 거 아니야? 어디에서 돈 얘기를 씨부ㄹ..
내가 지 마음에 든다는 설명이 가장 불쾌했고
해 본 적 없지만 잘 알고 있는 쌍욕이 떠올랐다.
뒤에 앉은 것이 그나마 신의 한 수.
웬만한 ㄱ소리면 내가 지금 몸이 너무 지쳐서
저기까진 참고 타려 했는데 이건 아닌 것 같아
이만 내리겠으니 세워달라고 말했다.
그때 <딸깍>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귀가 밝아서 소리가 더 크게 감지되었다.
소름
설마 했는데 문이 안 열리는 것이었다.
난생처음 당황했다. 어떤 차주를 만나도 이런
두려움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소름이 돋았다.
차주를 쳐다보자
- 싫어요, 안 열어줄 거예요. 안 돼요!
이런 ㄱ소리를 했다.
- 택시비 드릴게요.
- 필요 없어요.
- 그럼 내릴게요.
- 싫어요. 연락처 줘요.
- 문 열어주세요.
- 나랑 앞으로 만나주면 열게요!
다소 편히 기대었던 자세를 바로 하고 두뇌를
풀가동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빠져나가려면
이 남자를 설득해야만 한다. 대관절 왜.. 하..
설득력 급등
분위기가 험악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마치,
조르는 어린애처럼 열심히 조르는 중이었다.
살다 살다 이런 ㅁㅊㄴ을 달래기는 처음이나
나도 살기 위해서 달래야만 했다. 하......
그 오래전 대화가 일일이 기억나지도 않고
기억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만일
계속 정색한다면 오히려 위험할지도 모르니
나긋나긋 조용하게, 내가 왜 너 같은 ㅅㄲ와
만날 수 없는지 설명하여 설득에 이르렀다.
차가 막혀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멀리 보이는 메트로까지 1/3정도 남았다.
- 이제 내릴게요. 너무 차가 막혀서 정말
걸어가는 편이 낫겠어요. 열어 주세요~.
탈출 성공
차주는 결국 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탈출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없던 힘도 생겨서
초스피드 한 걸음으로 금방 역에 도착했다.
역시 체력은 정신력에 달려 있음을 깨달으며
힘들다고 택시를 잡았던 자신을 반성하였고
그 구간은 물론, 그 뒤 혼자서는 택시를 아예
몇 년간 타지 않게 되었다. 걷게 해 줘 고맙다.
도를 넘은 찝쩍임과 매달리기일 뿐이었으나
내게 그런 경험은 더 필요 없었다.
오래 산 것 치고는 어쩜 희박한 확률이지만
한 번의 타격이 컸던 듯하다. 후에 기숙사로
들어와 가장 좋았던 점은 안전이었다. 항상
경비와 학생들이 가득하거니와 택시를 타도
친구들과 집이 같으니 같이 타기 일쑤였다.
가끔씩 부담을 느껴 일부러 집 아닌 근처가
집인 것 마냥 세우고 택시에서 내릴 필요도
없었다. 역시 몸보다 마음 편한 게 중요하다.
깨달음
새삼 깨달았다.
아! 지금까지의 안전은 어쩜 사람의 영역이
아니었구나. 나의 태도 덕분도 아니었구나.
하나님이 지켜 주셔서 안전했던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목사님이 하셨던,
'솔직한 남자가 제일 무서운 남자'라는 게
이 ㄸㄹㅇ 차주를 통해 밝혀지게 되었다.
여러분. 때로는 조금만 솔직하자.
조금만 솔직한 남자가 진정한 젠틀맨이다.
아니면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