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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sie May 06. 2024

무서운 택시

목사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긴 세월 숱한 택시를 랜덤으로 잡아타는 동안
한 번도 위험한 일이 없었다는 것은 기적이다.
그땐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기적이었음을.

그런데 딱 한 번, 무서웠던 적이 있다.
유일한 한 번이었는데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껴
수 년뒤 떠나던 날까지 그 구간은 걷기만 했다.


늦은 저녁


모스크바의 겨울밤은 깜깜하고 코가 차가웠다.

우리 학교는 크렘린, 즉 크레믈 근처에 있는데

내가 타는 지하철까지의 거리가 무척 애매하다.

트롤리가 아주 가끔 다녔지만 근처도 아니었다.


학교 연습실이 닫힐 때 나왔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발걸음이 무거웠다. 날씨도 추웠고.

웬만하면 걷겠는데 천리길 같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손을 뻗어 보았다. 이 도로의

끝에 내가 원하는 메트로 역이 있으니 누구든

태워만 준다면 방향은 무조건 같을 것이었다.


웬일로 좋은 차


즐비한 차들 사이에 딱 봐도 무거운 수입차가

내 앞으로 왔다. 이 차는 설 리 없다고 생각해

그냥 비키려는데 나를 태워주려 선 것이었다.


참 별 일이네. 어떤 언니는 택시 잡을 때마다 꼭

벤츠만 선다고 막 자랑하던(외모.. 음.. 생략)

내겐 항상 최고 후진 러시아 차만 선단 말이다.

그런 나에게 이런 날도 있다니 믿어지지 않지만

앞 문을 열고 목적지를 말하자마자 타라고 한다.


외모가 마치 동양인과 비슷했다. 순수 러시아인은

절대 아니었다. 뒷 문을 열고 앉자 역시 편안했다.

'아, 다행이다. 너무 힘들었는데!'

라고 생각했다. 차주가 ㄱ소리 하기 전까지는.


양심은 어디에


어디에서 오는 길이냐길래 학교에서 연습하다

돌아가는 길이라고 하자 이런저런 정상적인

질문들을 이어나가서 그냥 다 대답해 주었다.

어차피 탄 차에서 저 평범한 질문을 무시해야

할 이유도 없었고, 길지도 짧지도 않은 구간이

엄청나게 막히고 있어서 빨리 도착하기 글렀다.


그렇게 한동안 보통의 질문만 하다가,

이 젊은 남자가 선을 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일일이 적을 가치도 없지만 뭐 이런 것 말이다.

자기도 악기를 배우고 싶은데 레슨 받을 수 있냐

연락처를 달라, 배우고 싶다 이런 쓸데없는 말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만일 한국인이 그런다면 무척 당황하겠지만

러시아에서는 유연히 넘길만한 레벨이랄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 나는 결혼해서 아내랑 자녀가 넷이 있는데

  둘은 두바이로 유학 보냈어요.

- 아, 그렇군요.

- 아내도 두바이에 왔다 갔다 해요.

- 아, 네.

- 그러니 당신과 만날 수 있어요.


이런 미친ㄴ을 봤나. ㅁㅊㅅㄲ 욕이 나올

했으나 할 말을 잃어 대꾸하지 않고 있었다.


아 물론, 유부남이 총각행세를 하는 것도 나빠.

그렇지만 이건 또 뭐야. 애가 넷이라고 하면서

만날 수 있냐고 묻더니 무려 조르는 것이었다.

살다 살다 이렇게 철면피인 남자는 처음 봤다.



희대의 ㄱ소리


경제적으로 얼마큼의 여유가 있는지 얘기한다.

미친 거 아니야? 어디에서 돈 얘기를 씨부ㄹ..

내가 지 마음에 든다는 설명이 가장 불쾌했고

해 본 적 없지만 잘 알고 있는 쌍욕이 떠올랐다.

뒤에 앉은 것이 그나마 신의 한 수.


웬만한 ㄱ소리면 내가 지금 몸이 너무 지쳐서

저기까진 참고 타려 했는데 이건 아닌 것 같아

이만 내리겠으니 세워달라고 말했다.


그때 <딸깍>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귀가 밝아서 소리가 더 크게 감지되었다.



소름


설마 했는데 문이 안 열리는 것이었다.

난생처음 당황했다. 어떤 차주를 만나도 이런

두려움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소름이 돋았다.


차주를 쳐다보자


- 싫어요, 안 열어줄 거예요. 안 돼요!


이런 소리를 했다.


- 택시비 드릴게요.

- 필요 없어요.

- 그럼 내릴게요.

- 싫어요. 연락처 줘요.

- 문 열어주세요.

- 나랑 앞으로 만나주면 열게요!


다소 편히 기대었던 자세를 바로 하고 두뇌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빠져나가려면

이 남자를 설득해야만 한다. 대관절 왜.. 하..



설득력 급등


분위기가 험악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마치,

조르는 어린애처럼 열심히 조르는 중이었다.

살다 다 이런 ㅁㅊㄴ을 달래기는 처음이나

나도 살기 위해서 달래야만 했다. 하......


오래전 대화가 일일이 기억나지도 않고

기억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만일

계속 정색한다면 오히려 위험할지도 모르니

나긋나긋 조용하게, 내가 왜 너 같은 ㅅㄲ

만날 수 없는지 설명하여 설득에 이르렀다.


차가 막혀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멀리 보이는 메트로까지 1/3정도 남았다.


- 이제 내릴게요. 너무 차가 막혀서 정말

  걸어가는 편이 낫겠어요. 열어 주세요~.



탈출 성공


차주는 결국 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탈출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없던 힘도 생겨서

초스피드 한 걸음으로 금방 역에 도착했다.


역시 체력은 정신력에 달려 있음을 깨달으며

힘들다고 택시를 잡았던 자신을 반성하였고

그 구간은 물론, 그  혼자서는 택시를 아예

년간 타지 않게 되었다. 걷게 해 줘 고맙다.


도를 넘은 찝쩍임과 매달리기일 뿐이었으나

내게 그런 경험은 필요 없었다.


오래 산 것 치고는 어쩜 희박한 확률이지만

한 번의 타격이 컸던 듯하다. 후에 기숙사로

들어와 가장 좋았던 점은 안전이었다. 항상

경비와 학생들이 가득하거니와 택시를 타도

친구들과 집이 같으니 같이 타기 일쑤였다.


가끔씩 부담을 느껴 일부러 집 아닌 근처가

집인 것 마냥 세우고 택시에서 내릴 필요도

없었다. 역시 몸보다 마음 편한 게 중요하다.



깨달음


새삼 깨달았다.

아! 지금까지의 안전은 어쩜 사람의 영역이

아니었구나. 나의 태도 덕분도 아니었구나.

하나님이 지켜 주셔서 안전했던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목사님이 하셨던,

'솔직한 남자가 제일 무서운 남자'라는 게

이 ㄸㄹㅇ 차주를 통해 밝혀지게 되었다.


무서운 남자 글 참조



여러분. 때로는 조금만 솔직하자.

조금만 솔직한 남자가 진정한 젠틀맨이다.



아니면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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