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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sie May 08. 2024

아파트 흔들기

feat.ㄱㅅㄲ (in 러시아어)

살면서 딱 한 번, 러시아어로 욕을 한 적 있다.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상대가 확실히 듣도록,
무려 러시아 남자 두 명에게 말이다.
그들은, 가던 길에서 돌이켜 날 쫓아왔다.

한국 베프는 러시아 욕을 잘한다고 자랑했다.

욕 대회에 나가면 현지인을 제치고 무조건 1등 할 수..

한국 여자 룸메도 러시아 욕을 많이 알고 있었다.

누가 욕을 하면, 알기 때문에 기분이 나쁘다고...


나는 유학 초창기에 이미 결정했다.

러시아어로 욕을 배우지 말아야겠다라고.


욕을 안 배우면 하고 싶을 때에도 몰라서 못 하고

누가 내게 욕을 하더라도 잘 못 알아들어 좋으니

아예 배우지 않는 겠다고 판단했다.


사람은 이성, 감성 외에도 '혼'과 '영'의 존재라서

욕을 들으면, 모르는 언어라도 눈치 챌 수 있지만

내용을 상세히 알아듣는 유익하지는 않으니까.



욕의 역사


누워서 침 뱉기이지만,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당시

짝꿍에게서 욕을 배웠다. 우리 집에 욕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성을 합쳐 총 네 글자 순 우리말 이름인

짝꿍을 만나, 일종의 새로운 언어 세계가 펼쳐다.


ㄲㅊㅁ는 매우 유창하게 남자애들을 향해 욕 했다.

 열면 듣도 보도 못한 욕을 쏟아내던 친구로부터

충격과 영향을 받고 흡수해 버린 나는, 2학년 무렵

"야, 이 썩어빠진 해골바가지야!"라는 다소 이상한

욕을 하고 있었다. 그 표현도 그 친구에게서 배웠다.


알고 보 친절한 ㄲㅊㅁ의 집에 한 번 놀러 갔는데,

그 집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더 놀라고 말았다.

ㄲㅊㅁ 할머니께서 쌍욕을 마구 퍼붓고 계셨다.

맙소사, 식구끼리 욕이 난무하는 가운데 난 쫄았고,

다시 갈 수는 없었다. 전투력이 난무하는 집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성경을 읽던 어느 날,

다정한 권유처럼 이런 마음이 들려왔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언어도 바르게 사용해야지>


그날부터 해골바가지니 뭐니 하는 욕을 그만뒀고

필요시 욕 해주는 든램지를 내심 좋아하고 있다..

ㅋㅋ  잘하는 것 때문에 좋다는 뜻은 아니다!


욕의 발단


모스크바에서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교회 사람, 학교 사람, 마트 계산대 직원 정도였으니

면전에 욕하고 싶은 순간이 있을 리 없었다.


물론 그럴만한 일이 가끔 생길 수 있지만

그렇다고 상스런 욕을 할 만큼 화나지 않는 성향.

설사 한다고 해도 한국말로 하면 되지 않을까?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왔다.

엄마는 희생적인 인물이라, 나의 이사 때마다

짐 싸는 것을 돕기 위해 꼭 일을 하러 오셨다.


집, 학교, 교회 위치가 다 시내 중심가였지만

그날 밤 목적지는 다소 한적한 남쪽 끝이었다.


엄마와 메트로 역 문 두 개를 열고 나와 지하도에

입성하는데 러시아 남자 둘이 돌진하듯 성큼 와서

엄마를 일부러 세게 밀치고 지나가며 비웃었다.

욕도 했는데, 잘은 몰라도 욕인 것 정도는 알았다.


한 명은 키가 크고 다른 한 명은 작은 남자였고

10대 후반이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들에게는 대개 우리보다 빠른 노안이 오니까.


아마 엄마가 워낙 젊고 날씬해서,

딸과 엄마 아닌, 친구들로 생각했을 것이 뻔하다.


나를 밀었다면 물론 욕할 만큼 기분 나쁘더라도

욕을 대놓고 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감히 우리 엄마를 어깨로 밀쳐버리고 가다니

나는 분노했다.


분노는 나에게 있어 아주 드물고 명확한 단어이다.

내가 분노했다면 그것은 외국 남자 앞에서도 이미

두려움 따위 없이 맞설 수 있을 만큼의 에너지였다.


"Сука!"


정확한 발음, 또렷한 목소리, 고개를 뒤로 돌려

상대에게 향한 채 처음으로 그 단어를 내뱉었다.


어, 잠깐. 욕 안 배웠다고 하지 않았냐고..?

물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모든 욕의 기초와도

같아서,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는 쌍욕이다...

정확히 우리나라의 ㄱㅅㄲ 에 해당된다.



반격


당하기만 할 줄 알았던 동양 여자애가 욕을 하자

순간 낯빛이 변했는데, 워낙 빠르게 돌진하던 터라

그들의 몸은 메트로 입구 문에 반쯤 들어가 있었다.


나는 엄마 팔짱을 끼고 빠른 걸음으로 지하도에서

계단을 통해 지상으로 올라왔다. 어두운 밤이었다.

시내는 밝고 덜 위험하지만, 이런 동네는 좀 다르다.


그때였다.


- 워!!


돌연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아까 그 남자 둘이 다시

쫓아와 겁을 주면서 나를 치기라도 하려는 듯했는데


그 순간


-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

   아아아아아아아아~~~~~~~~~~!!!!!!!!!!!



정말이야! 흔들흔들했다니까


내 목소리는, 내가 원할 때 아주 큰 소리를 낼 수 있다.

엄마 말로는 저 멀리 아파트 단지가 흔들렸다고 한다.

정말이라고. ㅋㅋ 앞뒤로 흔들렸다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 비명소리가 나자마자 둘 다 깜짝 놀라서 ㅋㅋㅋㅋ

용수철 튕기듯 도망가버렸다......... ㅋㅋㅋㅋㅋㅋ


많지 않았지만 주위에 지나가던 사람이 다 쳐다보고

쏜살같이 도망가 버린 놈들을 뒤로하고 엄마와 다시

갈 길을 갔다. 엄마는 너무 놀라고, 무서웠다고 했다.


사실 나도 놀랐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상대에게 순간 두려움을 주셨다고 생각한다.

를 항상 눈동자 같이 지켜주신 분이 말이다.


당시에는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엄마 말씀으로는

들이 쫓아올 때 지나가다 어떤 할머니가 보시고

그러지 말라 뭐라셨단다. 말은 몰라도 다 알아들음.



할 만하니까 했지


- 너 아까 뭐라고 한 거야?

- 응?

- 뭐라고 했는데 쟤들이 쫓아와?

- 아.. 아니야.

- 뭐라고 했는데??

- 했어.

- 무슨 욕?!

- 그냥 기본적인 욕이야. 아주 기본적인..

- 욕을 왜 해. 큰일 나면 어쩌려고..!

- 욕을 할 만하니까 했지. 어디서 감히 엄마한테...


그래도 네 목소리 덕분(??)에 살았다시며

가끔 그 이야기가 나오면 엄마는 또 말씀하신다.


- 소리를 지르자, 막 이렇게, 이렇게 앞뒤로

   아파트가 움직였어. 동네가 다 움직였다니까~!


- 나도 알아. 누나랑 빠리에 갔을 때 소매치기가

나한테 접근해서 다시 누나 지갑 뺏으려고 하니까,

누나가 소리 질렀는데 그때도 동네가 흔들렸어.

레스토랑 안에 있던 주인이 나와서 쳐다보니까

그 흑인 둘이 결국 그냥 갔잖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렇게 모스크바 한 번, 빠리 한 번,

세게 흔들고 온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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