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나를 부르는 건가?
그럴 리 없지만 이상한 느낌에 뒤를 돌자
멀리에서 한 러시아 남자가
나를 애타게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나에게 달려오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걸음이 빠르다.
스스로에 대해 몰랐는데 남들이 알려주었다.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들을 했다.
- 어휴, 너 따라다니다 힘들어 ㅈ는 줄 알았다.
나도 10살 어리면 너처럼 걸을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빨리 걸으니까 맨날 배고프다고 하지.
(같이 여행 다녀온 10살 위 언니)
- 허허.. 젊을 적에는 나도 걸음이 빨랐지..
(부모님보다 조금 더 연세 드신 목사님)
- 나는 언니처럼 못 뛰어. 빨리도 못 걷겠고.
핑계를 대는 게 아니라, 진짜 불가능해...
(친했던 여학생)
- 왜 이렇게 살이 안 찌나 했더니 알았다.
이렇게 빨리 걸어서 그런 거였구나!
(기숙사 가는 길에 마주쳐 같이 걷던 친구)
- 얘를 쫓아갈 수가 없어. 너무 빨라서.
같이 가다가 저만큼 멀어져 뒤돌아서 기다려.
따라가느라 힘드니까 팔짱이라도 끼고 싶은데
그러면 오해받을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글쎄 소매치기가 얘를 못 따라잡더라니까.
우리 엄마 70살 때도 딸인 나보다 빨랐는데
네가 외할머니랑 똑같다. 너무 빨라도 안 돼-!
(우리 엄마....)
모두의 공통점은, 나와 걷는 초기에 말하지 않고
다 걸어놓고 혹은 나~중에 토로한다는 점이었다.
바로 말해 주었다면 인식해 속도를 늦췄을 텐데.
나도 느리게 걸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보통 빨랐다.
왜 이렇게 빠른가, 그 이유에는
1. 외할머니의 유전자
2. 아버지의 유전자
3. 모스크바가 추워서
모스크바는 늘 겨울이 아니다. 봄여름가을겨울
다 있다. 다만 겨울에 밖은 춥고 실내는 따뜻하니
내 걸음이 그래서 더 빨라졌을 수도.
나를 쫓아온 남자 1
이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다.
즉슨 이러했다.
엄마와 메트로에서 내려 지하도를 거쳐
계단을 올라가는 중이었는데,
나는 계단도 2개씩 오르내리는 사람이었다.
러시아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는 무척 긴데,
안 쉬고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의 체력이었고
유럽 성당- 계단으로만 올라가는 높은 곳도
상대방을 위해 중간에 쉬어준 적이 많았다.
성당 탑 계단에서 한국남자 두 명이 매우
거친 숨을 내쉬며 ㅈ을 것 같다고 할 때에도
나는 참을 만하다 싶었던 웃픈 순간도.
이렇다 보니, 지하도 계단쯤은 순식간이었다.
지상으로 나왔는데 막상 엄마가 옆에 없었다.
뒤돌아 엄마를 찾자 수많은 사람 중 저 뒤에서
헐레벌떡 이리로 급히 오고 계셨고 기다렸다.
- 세상에..!
엄마는 나에게 귓속말로 (한국말이라 크게 할지언정
아무도 못 알아들을 텐데..ㅋㅋㅋ) 이러셨다.
- 왜? 왜?
- 큰일 날 뻔했어! 글쎄 네 뒤를 계속 어떤 남자가
쫓아가는데 네가 빠르니까 그 사람이 쫓아가다
계단에서 손을 뻗고, 네 가방을 계속 잡으려고,
뻗으면 안 잡히고, 또 뻗으면 안 닿고,
네가 하도 빨라서 소매치기가 못 잡은 거야!
너무 놀란 엄마가 얼른 알려주고 싶어도
3등이라 나와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1등 나
2등 소매치기
3등 우리 엄마
그렇게 일명 '소매치기도 못 따라잡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이 되었다.
나를 쫓아온 남자 2
언젠가 외국에서 연주할 일이 있었고
일부러 모스크바 경유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졸업 후 두 번 다녀왔구나.
당시 친구집에 머물었는데 그 언니가
외출하려던 나를 민망해했다.
- 어머, 너 그러고 나가려고?
- 네, 왜요?
- 옷이 그것밖에 없니..?
- 아.. 별로 안 가져와서. 이상해요?
- 그건 아닌데 좀...
언니는 명품 원피스를 꺼내어 보여주었지만
끌리지 않아 거절했다. 그러자 가방을 주며
- 그럼 이거라도 매고 가.
- 네?
- 가방이 너무.. 너 가방도 없니?
- 아.. 지금 여행용 밖에 없어서요.
이거 비싼 거 아니에요? 부담스러운데..
- 여기 있는 동안 이거 매고 다녀.
- 아 괜찮은데.. 감사해요.
백팩이라 팔이 편할 것 같아 받아 맸다.
지하철 역에 도착한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에스컬레이터에서부터 멈추지 않고 걷다
지상에서 뛰기 시작했다. 시간이 촉박해도
뛰면 충분히 예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 나를 부른 것일까
순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맙소사.....
그냥 찐 맙소사 그 잡채......
바닥에, 내가 지나온 흔적처럼 내 물품이
이것저것 여기저기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더 중요한 것은 저 멀리에서 러시아 남자가
나를 애타게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나에게 달려오는 것이 분명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그제야 내 가방을, 아니, 언니 가방을 보자,
뚜껑이 다 열려 있었다. 백팩이 일반적이지
않아, 지퍼 없는 가죽으로 덮던가 그랬는데
얼마나 활기차게 뛰었으면 그게 다 열리며
안의 물건들이 쏟아져 내린 것이란 말인가!
지갑!
가방안에 지갑이 없었다!
바닥에도 다른 물건들만 떨어져 있을 뿐!
내가 비로소 멈춘 뒤 그는 점점 가까워졌고
달려온 남자의 손에 내 지갑이 들려져 있었다.
사연이 있어 한 때 지니고 다니던 명품이었다.
그 지갑 안에 현금도 넉넉했고 카드도 있었다.
남자는 정말이지 너무 힘들어 보였다.
처음에는 마주 서서 말도 못 했다.
쫓아오느라 숨이 쉬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흘린 지갑을 주워 지하철 아래에서부터
길고 험한...길을 끝까지 달려와준 것이다!
현금을 꺼내거나 지갑만 되팔아도 쏠쏠하고,
나를 따라오기 힘드니 가질 수도 있었을텐데
얼마나 필사적으로 달려온 것일까!
지갑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 계속 불렀는데, 헉헉, 헉헉, 그냥 가셔서,
헉헉, 지금, 헉헉, 처음에는 내 친구랑 헉헉
같이 달려가다가, 걔가 도저히 더 못 뛰겠다
그래서 뒤쳐진 바람에, 저 혼자, 헉헉
지갑을 열자,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와...... 진짜..........
너무 대감동인데, 정말 감사하다고 말하자,
여전히 숨이 찬 상태로 손사래 치듯 웃으며
바로 뒤를 돌아 아마도 자기 친구에게로
뛰어가버렸다.
감사하다는 말 외에 보답도 못 하고,
그렇게 그 러시아 남자는 사라져 버렸다.
이 비싼 가방이 날 감당 못하는구나 싶어
가방을 언니에게 반납했다. ㅋㅋㅋ
교회에 도착하기도 전,
그 사람에게 은혜를 받은 셈이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