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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sie May 09. 2024

은인과 소매치기

내가 젤 빨라

설마 나를 부르는 건가?
그럴 리 없지만 이상한 느낌에 뒤를 돌자
멀리에서 한 러시아 남자가
나를 애타게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나에게 달려오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걸음이 빠르다.

스스로에 대해 몰랐는데 남들이 알려주었다.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들을 했다.


- 어휴, 너 따라다니다 힘들어 ㅈ는 줄 알았다.

  나도 10살 어리면 너처럼 걸을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빨리 걸으니까 맨날 배고프다고 하지.

(같이 여행 다녀온 10살 위 언니)


- 허허.. 젊을 적에는 나도 걸음이 빨랐지..

(부모님보다 조금 더 연세 드신 목사님)


- 나는 언니처럼 못 뛰어. 빨리도 못 걷겠고.

  핑계를 대는 게 아니라, 진짜 불가능해...

(친했던 여학생)


- 왜 이렇게 살이 안 찌나 했더니 알았다.

  이렇게 빨리 걸어서 그런 거였구나!

(기숙사 가는 길에 마주쳐 같이 걷던 친구)


- 얘를 쫓아갈 수가 없어. 너무 빨라서.

  같이 가다가 저만큼 멀어져 뒤돌아서 기다려.

  따라가느라 힘드니까 팔짱이라도 끼고 싶은데

  그러면 오해받을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글쎄 소매치기가 얘를 못 따라잡더라니까.

  우리 엄마 70살 때도 딸인 나보다 빨랐는데

  네가 외할머니랑 똑같다. 너무 빨라도 안 돼-!

(우리 엄마....)


모두의 공통점은, 나와 걷는 초기에 말하지 않고

다 걸어놓고 혹은 나~중에 토로한다는 점이었다.

바로 말해 주었다면 인식해 속도를 늦췄을 텐데.


나도 느리게 걸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보통 빨랐다.


왜 이렇게 빠른가, 그 이유에는


1. 외할머니의 유전자

2. 아버지의 유전자

3. 모스크바가 추워서


모스크바는 늘 겨울이 아니다. 봄여름가을겨울

다 있다. 다만 겨울에 밖은 춥고 실내는 따뜻하니

내 걸음이 그래서 더 빨라졌을 수도.



나를 쫓아온 남자 1


이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다.

즉슨 이러했다.


엄마와 메트로에서 내려 지하도를 거쳐

계단을 올라가는 중이었는데,

나는 계단도 2개씩 오르내리는 사람이었다.


러시아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는 무척 긴데,
안 쉬고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의 체력이었고
유럽 성당- 계단으로만 올라가는 높은 곳도
상대방을 위해 중간에 쉬어준 적이 많았다.
성당 탑 계단에서 한국남자 두 명이 매우
거친 숨을 내쉬며 ㅈ을 것 같다고 할 때에도
나는 참을 만하다 싶었던 웃픈 순간도.


이렇다 보니, 지하도 계단쯤은 순식간이었다.

지상으로 나왔는데 막상 엄마가 옆에 없었다.

뒤돌아 엄마를 찾자 수많은 사람 중 저 뒤에서

헐레벌떡 이리로 급히 오고 계셨고 기다렸다.


- 세상에..!


엄마는 나에게 귓속말로 (한국말이라 크게 할지언정

아무도 못 알아들을 텐데..ㅋㅋㅋ) 이러셨다.


- 왜? 왜?


- 큰일 날 뻔했어! 글쎄 네 뒤를 계속 어떤 남자가

  쫓아가는데 네가 빠르니까 그 사람이 쫓아가다

  계단에서 손을 뻗고, 네 가방을 계속 잡으려고,

  뻗으면 안 잡히고, 또 뻗으면 안 닿고,

  네가 하도 빨라서 소매치기가 못 잡은 거야!


너무 놀란 엄마가 얼른 알려주고 싶어도

3등이라 나와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1등 나

2등 소매치기

3등 우리 엄마


그렇게 일명 '소매치기도 못 따라잡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이 되었다.




나를 쫓아온 남자 2


언젠가 외국에서 연주할 일이 있었고

일부러 모스크바 경유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졸업 후 두 번 다녀왔구나.


당시 친구집에 머물었는데 그 언니가

외출하려던 나를 민망해했다.


- 어머, 너 그러고 나가려고?

- 네, 왜요?

- 옷이 그것밖에 없니..?

- 아.. 별로 안 가져와서. 이상해요?

- 그건 아닌데 좀...


언니는 명품 원피스를 꺼내어 보여주었지만

끌리지 않아 거절했다. 그러자 가방을 주며


- 그럼 이거라도 매고 가.

- 네?

- 가방이 너무.. 너 가방도 없니?

- 아.. 지금 여행용 밖에 없어서요.

   이거 비싼 거 아니에요? 부담스러운데..

- 여기 있는 동안 이거 매고 다녀.

- 아 괜찮은데.. 감사해요.


백팩이라 팔이 편할 것 같아 받아 맸다.

지하철 역에 도착한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에스컬레이터에서부터 멈추지 않고 걷다

지상에서 뛰기 시작했다. 시간이 촉박해도

뛰면 충분히 예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 나를 부른 것일까

순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맙소사.....

그냥 찐 맙소사 그 잡채......


바닥에, 내가 지나온 흔적처럼 내 물품이

이것저것 여기저기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더 중요한 것은 저 멀리에서 러시아 남자가

나를 애타게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나에게 달려오는 것이 분명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그제야 내 가방을, 아니, 언니 가방을 보자,

뚜껑이 다 열려 있었다. 백팩이 일반적이지

않아, 지퍼 없는 가죽으로 덮던가 그랬는데

얼마나 활기차게 뛰었으면 그게 다 열리며

안의 물건들이 쏟아져 내린 것이란 말인가!


지갑!


가방안에 지갑이 없었다!

바닥에도 다른 물건들만 떨어져 있을 뿐!


내가 비로소 멈춘 뒤 그는 점점 가까워졌고

달려온 남자의 손에 내 지갑이 들려져 있었다.

사연이 있어 한 때 지니고 다니던 명품이었다.

그 지갑 안에 현금도 넉넉했고 카드도 있었다.


남자는 정말이지 너무 힘들어 보였다.

처음에는 마주 서서 말도 못 했다.

쫓아오느라 숨이 쉬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흘린 지갑을 주워 지하철 아래에서부터

길고 험한...길을 끝까지 달려와준 것이다!


현금을 꺼내거나 지갑만 되팔아도 쏠쏠하고,

나를 따라오기 힘드니 가질 수도 있었을텐데

얼마나 필사적으로 달려온 것일까!


지갑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 계속 불렀는데, 헉헉, 헉헉, 그냥 가셔서,

  헉헉, 지금, 헉헉, 처음에는 내 친구랑 헉헉

  같이 달려가다가, 걔가 도저히 더 뛰겠다

  그래서 뒤쳐진 바람에, 저 혼자, 헉헉



지갑을 열자,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와...... 진짜..........

너무 대감동인데, 정말 감사하다고 말하자,

여전히 숨이 찬 상태로 손사래 치듯 웃으며

바로 뒤를 돌아 아마도 자기 친구에게로

뛰어가버렸다.


감사하다는 말 외에 보답도 못 하고,

그렇게 그 러시아 남자는 사라져 버렸다.


이 비싼 가방이 날 감당 못하는구나 싶어

가방을 언니에게 반납했다. ㅋㅋㅋ




교회에 도착하기도 전,

그 사람에게 은혜를 받은 셈이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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