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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sie May 28. 2024

길 물어보기

feat. 러시아 할머니

- 엠 뜨리!! M3를 타면 거기로 가지!

암, 러시아 할머니는 아무도 못 이기지.
할머니는 다짜고짜 내 등을 잡아끌더니
그쪽이 아니라며 몇 번씩 길을 설명했다.


길을 잘 묻는 러시아인


나는 모스크바에서 뚜벅이였고 걸음이 빨랐다.

혹시 그래서 남들 보기에 확신이 있어 보였나?

나에게 길을 물어보는 러시아인이 제법 많았다.


그땐 GPS 기능을 잘 이용하지 않기도 했지만

딱히 그래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얼마 전 모스크바에서도 쇼핑몰 안내 맵 앞에

서 있던 나에게 러시아인이 길을 물었으니까.


나도 길치인데 갑자기 책임감이 급상승해 맵을

보고 방향을 알려주자 내 말만 철석같이 믿고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던 여자가 생각난다.

확신은 했지만 '혹시 그쪽이 아니면 어떡하지'

하고 맵을 다시 보고 안도하다 문득 든 생각.


만일 나라면, 서울 한복판에서 외국인에게 길을

물어볼까? 안 물어볼 것 같은데. 한국인끼리도

잘 안 물어보... (도를 아십니까 인상이 좋으시..)


함정:나를 외국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 있음



 길 물어보기


우리 학교는 크레믈 도보거리이다.

여러 번 언급해서 구독자라면 다 아실 듯.


테러 방지로 길을 막아 우회해야만 하는 타이밍.

내가 갈 방향을 막아버리면 당황하기 마련이다.

앞으로 가야 하는데 뒤로 가라니, 어쩌라는 건지.


멀리 보이는 꼭대기에 별 달린 크레믈과 막힌 길

반대로 걷다 광활한 대로에서 방향을 잃었다.

지도 앱을 보아도 길치에게는 혼란만 가중되어

마침 길을 지키던 군인에게 물어보게 되었다.


군인에게 길을 묻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국가행사 전날 밤, 대로에 진짜 탱크를 끌고 나와

연습을 하는데, 워낙 센터라 보통은 다 퇴근하고

거주자도 거의 없지만, 학교에서 밤에 나온 나는

길이 막힌 타이밍에 맞닥뜨리기도 했다. 도로변에

군인들이 깔려있어서인지, 나뿐 아니라 사람들이

은근히 군인에게 물어본다. 여기로 가면 안 되냐

언제까지 길을 막냐 등등. 막상 보면 앳된 청년들.

물어보면 대답도 잘해주고. 길을 몰라 그렇지...



일단 물어보기


- 저, 실례지만 이쪽이 이 주소인가요,

   저쪽이 이 주소 방향인가요?


청년은 내 폰의 지도앱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주소를 듣고도 아직 화면을 보고 있다는 건

길을 모른다는 뜻인데...


- 이쪽이.. 맞겠죠?


몰라도 나보단 낫겠지 싶어 아직 지도를

열심히 판독 중인 그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 뒤에서 내 등인지 팔인지를 잡고


- 어디, 발샤야 니끼츠까야?!


다짜고짜 묻는 분은 지나가던 할머니였다.


- 발샤야 니끼츠까야 13번지?

- 아, 네.

- 엠 뜨리! 엠 뜨리, 이 정류장에 오지.

  엠 뜨리가 발샤야 니끼츠까야로 가거든.

  그리고 그쪽이 아니라 반대방향이야-!

- 아, 그런가요!?

- 컨서바토리잖아. 13번지!


대단해.. 연주회 다니는 할머니이셨나...

우리 학교 주소를 꿰고 있다니 놀라웠다.


말은 안 했지만 "바보야, 그쪽이 아니라

반대 방향이지. 잘 갈 수 있겠어?"의 느낌.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할머니는 내 등 옷깃을

잡아끌몇 걸음 데려와 길 잃은 어린양에게

설명을 시작하셨고, 그 순간 나는 보았다.

군인 청년의 숨겨진 웃음을.



엠 뜨리!


- 엠 뜨리!! M3를 타면 거기로 가지!


암, 러시아 할머니는 아무도 못 이기지.


- 저 쪽은, 저기 봐, 응? 반대 방향이고,

   저어-기 봐. 저 멀리 둥근 건물, 보여?

- 아.. 저.. 저-거요?

- 저기 멀리 제일 끝에 있는 둥근 지붕~!

- 아~ 네!

- 거기까지 걸어가거나 버스 M3를 타.

   M3를 타도 네 학교 앞까지 갈 수 있어.

- 아 정말요?

- 그래, 버스 정류장이 바로 맞은편이야.

- 아, 감사합니다. 저는 걸어가려고요.

- 걸어간다고? 그럼 다시 저기를 봐.


혹여나 내가 잘못 갈까 봐 신신당부.

반복학습. 한참을 놓아주지 않으셨다.....


"감사합니다" 하고 할머니가 시킨 대로 

저 멀리 끝까지 걸어가다 드디어 아는 길이

나왔을 때 문득 들었던 생각.


'역시 따뜻하네...'


'터프하고...'


                    

그 할머니뿐 아니라 상당수가 그러하달까.

기가 세고 심술궂은 것 같다가도 정이 많아

길 물어보는 애 멱살이라도 붙잡고 말해 줄


암, 러시아 할머니는 아무도 못 이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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