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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sie Nov 07. 2015

이유

유독 너에게 인색했던 이유


나 보고싶지 않냐?


우리는 그런 식이었다.

내가 기분이 좋은 날엔 그 애는 기분이 별로 같았고

가장 위로가 필요한 날엔 아마 전화가 오지 않았고

나름 잘 지내고 있을 땐, 그렇게 불쑥 연락이 왔다.

포옹의 방법

물론 보고 싶었다.

나는 늘 네가 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응" 이라던가 "아니" 혹은 그보다 더 적절한 대답을 하지는 못했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아마도 난 필시, 언제나처럼, 그 말은 마치 못 들은 것처럼 전혀 관계없는 다른 답이나 장난으로 몰았을 거다.


골탕이라도 먹인 거냐고? 아니, 그렇지 않다.

몰랐다. 그런 말엔 어떤 답을 보내야 하는지.



기억


난 가끔 니가 밉다.
아주.
오늘처럼.
잘 자라.

불현듯 온 문자에 무어라 답을 했었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받았던 문자들은 이렇게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기억이란 무엇일까?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드문드문 사라진 조각들은, 지우고픈 갈망에 의해 흐려진 것일까 스스로의 마음을 보호하기 위한 이 뇌의 선택일까 아니면, 별 것 아니니 잊게 된 걸까.


참으로 이상한 것은, 아니 어쩌면 내가 고약한 건,

'그 문자'를 손에 꼽게 좋아 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아이가 하나도 밉지 않았다.  생각한 날에도 그 애가 정말 미웠던 적은 결코, 없었다.


오히려 위로를 받았을게다. 필시 그랬을 것이다.

내 생각을 하는구나. 잊어버리지 않았구나.

가끔 미워해주고 있구나. 그것도 많이.


어쩌면 나는 그 아이가 그렇게 가끔,

미워해 주기를 바랬는지도 모른다.


나는 너무 이기적이었다.


morendo


시 전화가 왔다. 얼마만이건 어색함은 없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하게 됐다고 말하면서도 그게 무언지 말하지 않고 있었고 나는 반복해 물었다.


"내가 이걸 지금 너한테 말하면, 니가 안 올거야."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

"아냐, 안 나올거야."

"일단 말을 해봐. 뭘 시작했는데!?"

"오면 말해줄게."

"먼저 말을 하라고."

"싫어, 말하면 니가 안 온다니까."

"아니 그걸 니가 어떻게 아냐구!!"

"아냐 내가 이 말 하면 넌 절-대 안 나올거야.. ...

 그런데.. 나는.... 니가 지금.. 많이 보고 싶거든."


nofilter ⓒ 2015. essie


(양심)고백


"좋아, 그럼 말할게. 대신 꼭 온다고 약속해."


"약속할게."


"나, 담배 피기 시작했어."



우린 어렸고, 순수했으며, 어리석었다.


그 애는 그 말을 한 뒤 곧 전화를 끊어버렸고

나는 전화기를 든 채 소리없이 울었다.

내가 가장 아끼는 그 아이가 담배를 피기 시작해서 눈시울이 붉어졌고, 그 말을 하면 내가 그 아이를 만나러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것 때문에 가슴이 너무 아파 울었다. 


그럴리가 없잖아.

네가 담배를 피기 시작했다는 이유로 내가,

그토록 보고 싶던 널 만나러 가지 않을 리 없잖아

라고 말하지 못했다.




난 꽤 오래 그 아이를 고문했다. 아니 날 고문했다.

곧잘 편지를 썼고, 모든 편지엔 '친구'라고 적었다.

분명 그 아이는 내 친구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내 심장도 하나 아깝지 않을.

사귀었다가 헤어지는 것 따위로 잃고 싶지 않았던.

할 수만 있다면 평생을 함께 하고 싶었던 내 친구.

코스모스를 좋아하는 줄 몰랐었다 * München ⓒ 2015. essie
우리가 무슨 친구냐?


"야, 너는 뭐 이렇게 이상한 걸 마시냐."

"내가 뭘-"


새 친구와 만나 처음 시켜본 쥬스였는데 지나가다

나를 보고는 그 애 답게 앉더니 내 쥬스를 마셨다.

그러고 보면 사실 우리는 또 몇 년 만에 마주쳤다.


"남자친구 있어요?"


초면에도 거침없이, 나이 따위 상관없이 당돌하게

이 언니에게도 물어보고 있었다. 별 의미는 없다.

얘는 누구를 만나도 항상 그냥 그런 질문을 하니까.


이어진 기억의 조각들. 몇 달 만이든 몇 년 만이든,

나와 마주치면 물었던 첫 마디. 잘 지내냐 건강하냐

어떻게 지냈냐 예의상이라도 묻지 않고 단 한 마디.


"너 남자친구는 생겼냐?"


그리고 늘 같은 나의 무응답에 또 이어진 한 마디.


"니가 그러면 그렇지."


질문을 받았으니 이 언니도 탄력을 받았던 것일까.

둘은 무슨 사이냐, 얘는 누구냐는 의미의 물음을

우리들에게 처음으로 직접 던져줘 버렸다.


0.1초의 멈칫함 사이 나는 반자동적으로 참 당연히

올바른 대답을 했다.


"친구예요. 제가 되게 아끼ㄴ.."


"우리가 무슨 친구냐?"


아마도 0.5초 쯤이었을 듯한 멈칫함을 다시 보내고

또 다른 0.5초의 어색함을 가뿐히 넘기며, 아마도

내가 주제를 바꿔 버렸던 것 같다. 그리고 웃었다.

당황했으니까. 우리 친구 맞으니까. 근데 네 말도

솔직히 맞으니까. 그래도 처음 본 人을 앞에 둔 채

내 앞에서 그리 말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보니까.


아니, 그런 것보다,

그런 말엔 무슨 답을 해야 하는지 여전히 모르니까.



앞에서 많이 웃는 사람은
뒤에서 많이 운대


"응?"

"앞에서 많이 웃는 사람은 뒤에서 많이 운대."

"..????"


생뚱맞게 무슨 말인가 하며 그 애를 쳐다 보았다.


"그 말을 왜 하는거야?"


"너 지금도 계속 웃고 있잖아."


인식하지 못했다. 내가 웃고 있다는 것을.

당황한 나는 또 실없이 웃고 말았다.



제발 얘 좀 데려가라


나는 이렇게 특별한 사람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세간의 주목을 받고 내가 원하는 것을 단 한가지만

빼고 모두 가졌다 여겨질 만큼 맘에 들었던 아이를.

그저 '여사친'인 나를 어떤 식으로든 불러내던 잘난

그녀들 역시 감당해 낼, 아니 이길 자신이 없었다.


'가라. 제발 내 눈 앞에서 다들 어서 떠나라.'

 

기다렸던 마음은 그런 마음으로 탈바꿈 중이었다.

나는 男을 두고, 다른 女와 싸우기는 커녕 신경전을

벌이는 것조차 견뎌내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누가 이 아이를 너무 좋아하면 스스로 비킬 준비를

하면서도 괴로워하는 형편없는 친구일 뿐이었다.


태연한 척 걸어나오던 나에게, 자기를 보러 날아온

여자를 가리키며 "얘도 제발 데려가라" 고 말했다.

그 둘이 남는 것도, 내가 그녀와 가는 것도 사실

어느 쪽이라도 마음에 들진 않았다.

ⓒ 2015. essie


내가 너에게 유독 인색했던 이유


흐려진 안개자욱 뒤의 찬 공기는 투명하다.

아무것도 볼 수 없게 온통 덮어버릴 땐 언제고

이제와서 어디로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일까.

라진 안개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무모하고 무의미할지도 모르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지껏 해 왔던 모든 핑계 따위를 다 내려놓고 나면,

알기 두려운 그것이 남으리란 걸 알고 있었던 걸까.


너에게 인색했던 만큼

너에게 냉정했던 만큼

너에게 상처줬던 만큼

너를 잃기 싫었다는 것.


가진 적 없는 너를 잃을까봐

유독 너에게 모질었다는 것.


네가 무대 위 주인공이라면

내가 선 곳은 사막 한 가운데.


그럼에도 오늘 너를 추억함은

사랑했던 십대를 추억함일지도.


너의 말에 무슨 답을 할지 몰랐듯

글을 적는 이유 같은 건 모를수도.


사라진 안개처럼 널 담은 이 글도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버릴 수도.


한 때 나를 미워해 준 것에 대하여

지금까지도 고마워하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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