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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sie Aug 04. 2024

단두대

나도 줄을 섰다

고개를 들어 올려야 볼 수 있을 만큼 높고
거대한 단두대가 문 밖에 세워져 있었다.
단두대 뒤로 끝이 보이지 않게 많은 사람이
일렬로 길게 줄 서 있었다. 자기 차례가 오면,
그 단두대에 목이 잘려 죽을 것이었다.


이 꿈은 아직도 나에게 미스테릭 하며

모든 꿈을 통틀어 지금까지 가장 세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나 나의 미래에

충분히 일어날 수도 있는 사안이기에

아직도 '진행형'이라 더 잊을 수 없다.


그저 영적인 의미에 그칠 것인지, 혹

정말 일어날 것인지는 살아봐야 안다.


일단 꿈을 다 이야기하기 전에 짚어둔다.

첫째, 이 꿈은 대학원생 때 기숙사에서 꾸었다.
너무 리얼해, 깰 때 기숙사 벽을 보고 안도했다.

그 전후로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북한친구가 없는 지 이미 오래인 시기였다 보니
미안하게도 북에 대해 생각조차 안 하던 때이다.

영화도 본 적 없고 책도 읽지 않았다. 음악 하고,
친구들과 놀고, 밥 먹고, 교회 다닌 게 전부였다.

둘째, 굳이 자세히 적기 싫어도 밝혀야만 하는
이 부분은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인가'이다.
꿈과 비교해 꼭 필요하기에 먼저 적어둔다.

나는 어릴 때부터 예수를 믿었지만
어떤 일을 계기로 믿은 것이 아니다.

알다시피 영적 꿈을 꾸며 영의 세계를 알았고
믿는 가정에서 자연스레 예배와 성경을 접해
하나님과의 일상 대화가 자연스럽던 타입.

그러나, '어떤 일'을 겪기 전까지는
막상 자리 잡고 하는 기도가 5분을 넘기지 못했고
'어떤 일'을 겪은 후 한 차원 더 깊이 겪긴 했으나,
그럼에도 본성적으로 줄곧 이렇게 생각해 왔다.

'큰 영광을 받지 못해도 좋으니 그냥
 보통으로 살다 곱게 천국 가고 싶다.'

다른 말로는,
누구처럼 예수를 전하다 고문받고 사자 밥 되고
순교하여 천국에서 빛나는 면류관을 받기보다는
못 받아도 되니 부디 조용히 살다 갈 수 있기를...

성경의 대표적 순교자 중 하나인 '스데반' 집사,
혹은 조선시대에 한국에 선교사로 와 돌아가신
외국 선교사님들은 나와 차원이 다른 분들이다,
순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난 노 땡큐다.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제 꿈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는 그때 커다란 건물 내부 1층에 있었다.

우측 5~6미터 거리에는 출입구-문이 있었고

전면 좌측 약 3~40도 각도 방향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꽤 널찍한 계단이 있었다.


건물은 불투명해도, 영안으로 건물 밖이 보였다.

심지어 고개를 돌리지 않았는데도 다 보였다.


밖에는 바로 앞의 한가운데에, 커다랗고 아주 높은

단두대가 있었고, 그 뒤로 끝이 보이지 않는 줄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모두 예수를 믿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죽을 순서를 기다리며 가만히 서 있었는데,

처형당해야 하는 이유는 한 가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장소는 우리나라가 맞는데, 정치적으로는 지금과

동일하지 않았다. 북한처럼, 예수를 믿으면 죽었다.


이미 죽임 당한 사람이 아주 많았고

지금도 계속 죽어나가고 있었으며

앞으로 죽을 사람은 더더욱 많았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나는,

부정할 의향은 없으나 빨리 나갈 생각도 없었다.

(나가면 나도 단두대 뒤로 줄 서야 하니까)


미적거린다는 표현이 딱 맞겠다.

꾸물거렸다.


그렇다고 도망갈 생각은 없었다.

예수를 부인할 생각 역시 없었다.


나도 처형당할 사실은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아, 신난다, 빨리 나가야지~" 이런

것은 아니었으므로 미적거리던 것이었는데


한 작은 영적 존재가 내 오른쪽으로 다가와서

"이제는 가야 할 시간"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말을 실제로 한 것은 아니고 영으로 알려줬다.

(그 존재는 어릴 때와 그  꿈에서도 나왔다)


나가야 한다니, 이제 정말 가야겠구나 싶었고

현실과 달리 의외의 놀라움은 여기서부터였다.


내가 속으로 생각하기를,

(꿈에서, 나 자신이지만 동시에 나를 보는 것)


만일 내가 이대로 아무 언급 없이 죽기만 하면

남은 사람들 중 누군가는 오해를 할 수도 있다,

억울하고 불행하게 죽었다더라~ 하는 오해를

남겨서는 안 되니, 분명하게 말하고 가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까 보이던 그 계단 위를 몇 개 올라가

엄마와 포옹하며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었다.


"엄마, 내가 잘 갔다고 해. 감사히, 잘 갔다고."


현실이라면 엄마가 "내가 네 대신 죽겠다"라며

나를 내보내려 하지 않을 듯한데 꿈은 달랐고,

마치 엄마도 수긍하시는 듯 등을 도닥이셨다.


이제 정말 가야겠다 싶어 비로소 몸을 돌렸다.

그전까지는 우측(문 방향)으로 몸을 돌리지도

않았으나 이제 정말 나가려 몸을 돌린 것인데...



이럴 수가!



세상에, 맙소사! 이럴 수가...!


실로 놀라운 광경을 목도하였다.


기억하는가,

건물 안에서도 밖을 볼 수 있었다고.


그리고 나도

죽을 것이지만 조금 지체했었다고.


그런데 안에서 밖을 다시 보았을 때

아까 보지 못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순교당한 영혼



단두대 옆 우측 방향으로 길고 검은 리무진 같은

고급 장례용 차 안에 방금 순교당한 사람의 영혼

그 얼굴 사진과 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방금 전,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단두대에

목 잘려 처형된 그리스도인이었는데, 그 사람의

영혼이 차에서 나와 하늘을 향해 위로 올라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눈으로 형체를 본 것이 아니라

마치 그 순간 내가 그가 되어 빨려 들어가듯, 그가

지금 겪고 느끼는 그대로 나도 체험한 것이었다.

(내가 아직 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내 영혼은,

방금 순교당한 그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같이 느껴버리고 말았는데 그것이 얼마나 놀랍고

경이롭고 대단하고 어마어마하고 무아지경이던지,


그때 속으로 생각하기를


'교가 이런 것이라면 나도 할 만하겠다'



순교가 그런 것인 줄 몰랐다



이 세상 모든 미사여구 형용사 그 어떤 나라 언어

단어를 전부 몽땅 끌어 모아본대도, 그 순교자가

경험한 희열의 극치는 감히 결코 표현할 수 없다.


'모든 희열의 최대, 극치'라는 말이 초라할 정도로

이 땅에서는 확신하건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는

그러한 기쁨과 희열의 감격이 상상을 다 초월했다.


실제로 순교할 생각이 0.1%도 없고

꿈에서 순교하러 나가기 꾸물대던 내가

그것을 간접경험하자 꿈에서조차 그러지 않았나.


순교가 이런 것이라면 나도 할 만하겠다.(아..)


이것은 지금조차 나에게 의미심장한 말이며

아직도 현실에서는 조심스러운 영역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꿈을 통하여 전반적인

'순교에 대한 틀'이 하루가 지날수록 변해갔다.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그간 스데반을 비롯한 순교자를 '다른 부류'로

정해둔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스데반이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똑바로 하늘을
우러러보며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 편에 서 계신 것을 보고 이르되,
보라, 하늘들이 열리고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내가 보노라, 하매 이에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자기들의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도시 밖으로 그를
내던지며 돌로 치니라. 또 증인들이 자기들의
옷을 사울이라 하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그가 하나님을
부르며 이르되,
주 예수님이여, 내 영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주여,
이 죄를 저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마옵소서,
하더라. 이 말을 하고 그가 잠드니라.
Acts 7:55-60

듣자 하니,  시대에는 묶어놓고 돌로 쳤다고 한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아, 뭐 하는 짓인가. 미쳤나..

나는 곱게 죽고 싶다. 천국 뒷자리여도 할 수 없다...


죽어가는 스데반을 보라. 일반인 레벨이 아니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예수님이 리스도라고

전한 이유만으로 자신을 죽이는 무리들을 위하여

숨을 거두기 직전, 그들을 용서해 달라 기도한다.


지나가다 공에 맞아도 아플 텐데, 웬 말인가.

바로 죽는 것도 아니고 맞아 죽어간 와중에...


이것이 내가 그들과  분리시킨 이유였다.

나는 저럴 수 없다. 그 정도의 레벨이 아니다.

순교자는 따로 있다.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꿈을 통해 내가 깨닫게 된 사실은

하나님은 결단코 잔인무도한 분이 아니시며

순교하는 사람들에게 고통만 있지 않았다는

생각해 보지 못한 내용이다.


돌에 맞아 죽을 때 당했을 고통만 상상이 됐다.

물론 예수님을 생각하며 견뎠겠지만 끔찍했다.

대체 어떻게 견디는 것일까, 같은 '사람'이면서.


그런데 알고 보니, 그들이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견딜만한 뭔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비밀

꿈에서, 간접이라기에는 너무 직접처럼 겪었다.


참고로, 위의 성경 내용은 자세히 기억을 못 했다.

순교 장면은 피하고 싶기에 빨리 넘겼던 것 같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스데반도 영의 눈이 열렸다.



와... 그래서 할 수 있었구나



지금, 오래된 이 내용을 적으면서도 육성으로

"와..."가 나올 정도로, 정말 그러했다.


그래서 할 수 있었구나.


원래 그 사람들도 나와 똑같은 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이 택하신 경우 그리 순교해 천국에 올 때

너무 힘들면 안 되니까 하나님이, 영적인 시각을

더 열어주시는 거였구나. 그러면 그 기쁨이 넘쳐

심히 놀랍고 위대해, 죽음의 고통이나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것이었구나. 순교자에게는 순교를

할 수 있는 다른 걸 더 주셔서 한 것이지, 일반적

삶처럼 평소와 같은 기준이 결코 아니었구나...


조금 비슷한 것으로는 아기를 낳는 고통이 있다.

죽을 만큼 고통스러우나, 그 다음은 새 생명이다.



하나님의 기준은 다르다


그래서 예수님도 십자가에 몸이 못이 박힐 때

그 고통을 끝까지 참고 견디어내신 것이었다.


그분은 늘 영의 눈이 열려있는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그리스도 메시아였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 뒤 부활로 생명이 나왔듯

예수를 위하여 죽는 순교자의 다음도 생명이다.



순교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우리가 아는 그 순교이고,

둘째는 일상에서의 자아의 순교이다.


육신이 죽지 않더라도 자존심, 욕심, 탐심이

죽는 것도 다른 종류의 순교에 해당이 된다.


그것들이 죽으면 내가 죽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살아난다. 그것이 생명의 비밀이다.


나중에 일어난 나의 훌륭한 벗 문경진의 순교도,

직접 목격했던 북한 사람들의 얘기로 전해지던

'유유히 걸어 나가 환한 얼굴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 증언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와 같은 꿈이었다.


내가 정말로 언젠가 단두대에 목이 잘려 죽을지

아니면 처음 원하던 대로 곱게 살다 곱게 갈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말이다,


 꿈이 이따금씩 생각날 때 꿈을 부정할 수 없고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 대도 받아들일 것 같다는,

원래의 나로서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가끔 든다.


그렇게 가고 싶다는 뜻을 품을만한 위인은 아니나

그렇게 가야 한다면 나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하나님께 훨씬 큰 사랑을 받은 자였다 생각될 거다.


지인 중, '꼭 순교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오랫동안

해 온 예쁜 여자 선교사님이 있었다. 미국 국적이고

화목한 가정에 직업도 좋았는데, 가족이 몽땅 함께

아프리카로 가 몇십 년째 그들을 도우며 살고 있다.


이 땅에서의 생명은 짧다. 장수하다 곱게 가도 짧다.

그다음은 길다. 그냥 긴 것이 아닌 '영원한 삶'이다.


영원한 것을 위하여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이를

우리는 무모하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대신 죽었을 만큼 희생적이고

자비로우시며 긍휼이 많은 분이시기에, 결코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몸이 죽는 순교를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생각보다 어쩌면 더 많이,

'그 비밀'을 알기 때문에 더 좋은 것을 얻고자 하는,

그리고 받은 은혜가 심히 커, 스스로 주를 사랑하여

자신도 주와 이웃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바쳐 내는

그런 사람들이 늘 있어왔고, 지금도 존재한다.


만일 당신과 내가 생각보다 오래 살게 돼

나중에 혹 우리나라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죽어야 하는 날이 온다면, 그날을 본다면,

나의 꿈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그리고 아래의 문구들도 떠올려 주기를 바란다.



내 명령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자기 친구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무엇이든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가 나의 친구니라. John 15:12-14
우리가 잠시 받는 가벼운 고난이
우리를 위해 훨씬 더 뛰어나고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 것을 이루느니라.
우리는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을 바라보나니
보이는 것들은 잠깐 있을 뿐이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은 영원하니라.
2Corinthians 4:17-18
그러나 만일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분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분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자신의 영을 통해
너희의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Romans 8: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시더라.
Luke 23:34
만일 우리가 이 세상 삶을 사는 동안에만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갖는다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가장 비참한 자니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을 통해 임한 것 같이
죽은 자들의 부활도 사람을 통해 임하였나니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게 되리라.
1Corinthians 15: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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