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edshoes Dec 29. 2020

반테이 스레이(Banteay Srei)를 향해

캄보디아

(여행시기 : 2019.2)


라오스에 우기와 건기 두 번을 갔는데, 난 우기에 한 표를 주고 싶다. 건기엔 땅이 메말라서 흙먼지가 많고 강물이 풍요롭지 않았으며 나무들도 윤기가 덜했기 때문이다. 비가 온다고 해도 한국처럼 하루 종일 내리는 건 아니었으니, 식물들의 싱싱한 생명력과 맑은 공기의 혜택을 생각해보면 앞으로도 우기 여행을 택하고 싶다. 더운 건 어차피 어느 계절이나 비슷했고, 한바탕 내린 스콜 때문에 열기가 식어서 오히려 쾌적한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이 캄보디아에도 해당될까? 어디서 보니 6월의 캄보디아는 호수가 범람하고 도로가 잠길 정도로 비가 많이 온다고 한다. 어쩌면 라오스에도 내가 모르는 우기의 피해들이 있겠지. 여행자는 어차피 순간의 경험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니.


우리가 캄보디아에 도착한 것은 건기가 한창인 2019년 2월이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흙먼지가 날리고 있었다. 나만 그랬던 건 아니겠지만, 앙코르와트 하면 정글 속에 홀연히 나타나는 폐허의 유적들, 뭐 이런 이미지가 있었는데, 실제로는 사람이 너무 많았고 운동장 같은 맨 땅에 우뚝 서 있는 유적들이 더 많았다. (일출 때 왔으면 느낌이 또 달랐겠지만. 저질체력에 게으른 우리는 어딜가건 정말 절박한 일(?)이 있기 전에는 해뜨기 전에 숙소를 나서지 않는다) 단체 관광객들까지 많다 보니 줄 서서 들어갔다가 잠시 사진만 찍고 나와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유적 하나하나는 대단했지만 분위기는 그랬다는 것이다.


앙코르 유적지 입장권은 1일권, 3일권, 7일권 이렇게 세 가지가 있었다. 3일권을 구입했다. 호텔 근처에 늘 대기하고 있는 뚝뚝이 아저씨에게 가서 어디 어디를 얼마에 가자고 흥정을 끝내면 이동이 시작된다. 뚝뚝이 운전사들은 코팅된 지도를 갖고 있는데 거기 하루에 다닐 수 있는 루트가 나와 있다. 큰 사원들이 모여있는 곳을 이틀간 보고 나자(앙코르와트가 유적들 전체를 부르는 말인 줄 알았는데 앙코르와트도 사원 중 하나의 이름이었다), 조금 멀리 가보고 싶어졌다. 가이드북에서 붉은색이 도드라지는 아름다운 사원의 사진을 보고 목적지로 정했다. 그것이 반테이 스레이였다.


앙코르 유적들이 제일 많이 모여있는 곳의 흙은 누런색이었는데, 외곽으로 나가자 붉은색의 땅이 펼쳐졌다. 전 가족을 다 태운 것 같은 오토바이, 이런저런 보따리들과 동네 아주머니들을 함께 실은 트럭이 붉은 땅을 탈탈 달린다. 씨엠립에서 반테이 스레이까지는 30km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뚝뚝이로 가다 보니 한 시간이 걸렸다. 흙먼지를 온통 뒤집어썼지만, 캄보디아 사람들이 사는 평범한 동네와 시골길의 풍경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라오스에서도 그랬지만, 뚝뚝이 여행은 항상 유쾌하다.



반테이 스레이는 근처의 땅처럼 붉은색의 사암으로 지어진 사원이었다. 뚝뚝이에서 내려 붉은색 길을 따라가다 보면 사원 입구가 나타난다. 입구는 현대식 가건물로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었지만, 구경하는 사람도 많이 없고 주변에는 나무들 밖에 없어서, 이곳이야말로 정글 속에서 홀연히 나타난 듯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힌두교에 대해 잘 모르지만, 뱀 아니 용의 형상을 한 나가(Naga) 신은 낯이 익었다. 섬세한 곡선 장식들, 문과 탑들,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 보이는 안뜰의 풍경은 감탄이 나오도록 아름답고 정교했고, 그 옛날 크메르 제국의 화려함 속으로 구경꾼을 데려다주었다. 앙코르 사원들 중에는 엄청난 각도의 계단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 곳도 있었고, 거대하고 웅장한 곳도 있었는데, 반테이 스레이는 작고 아담했다. 사원 안마당에는 원숭이처럼 생긴 4개의 형상들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는데, 이들은 반인반수의 수호신이라고 한다.


사원 주위에는 호수가 있었다. 건기라서 물은 얼마 없었다. 호수 건너편에서 보는 풍경도 독특했다. 녹색과 붉은색, 거무스름한 색감이 어우러졌다. 가까이서 보면 붉은색이었던 사원 건물들이 밖에서는 묘하게도 검은색에 가까워 보였다. 완벽하게 잘 정돈된 풍경이 아니라 약간 귀퉁이가 허물어진 느낌의 장소, 아름답지만 이미 과거에 속한 곳, 폐허까지는 아니지만 역사 속에 숨어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그런 비밀스러운 느낌의 장소였다.


캄보디아를 우기에 다시 방문할 날이 있을까? 식물들의 생명력에 휘감긴 유적을 보면 또 다른 느낌이 들 것 같다. 저 붉은 흙은 틀림없이 몹시 질퍽대겠지만. 영원히 살 것 같은 식물들의 에너지와 시간 속에서 조금씩 허물어져가는 옛 제국의 유적은 틀림없이 낭만적인 대조를 이룰 것이다. 누가 앙코르 유적 중에서 어디가 제일 좋았냐고 묻는다면, 잠시 망설이겠지만(다른 엄청난 유적들도 많았기에) 결국 반테이 스레이라고 대답할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루앙 프라방, 느린 시간 속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