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동안 ‘병’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왔다.
나는 그 안에서 질문하기보다는 익숙해지는 쪽을 택했다. 왜 이 검사가 필요한지, 왜 이 치료가 반복되는지 묻기보다는, 그렇게 배우고 그렇게 훈련받았고, 그렇게 환자를 도와야 했다. 의사의 처방에 맞춰 움직이고, 선배 간호사의 지시에 따라 뛰어다니며, 몸으로 일하는 시간이 쌓여갔다. 소화기내과 병동에서의 시간은 특히 밀도가 높았다.
바쁘고, 까칠한 선배들과 스텝들과 이런 저런 사건과 사람 때문에 마음이 다친 날도 많았지만, 그래도 함께 버텨낸 동기들과 좋은 선배들 덕분에 병원 생활 자체는 견딜 만했다. 그곳에서 나는 수많은 ‘진단명’을 보았다.
그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건 암 진단을 받은 환자들이었다. 처음엔 걸어서 입원했다가, 항암 치료와 퇴원을 반복하며 점점 쇠약해지고, 결국 다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 누워서 영안실로 가는 결말. 그 모든 순간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나는 종종 설명하기 어려운 회의를 느꼈다. 입원과 퇴원이 반복되는 동안 생겨난 정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 끝을 너무 자주 보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바쁜 간호사 였지만 병동에서 아직 정신은 또렷하지만 몸이 빠르게 약해지고 있던 한 환자에게 한 번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살지 않을 거예요.
돈 번다고 밤새고, 밤마다 야식 먹고, 그게 이렇게 젊은날 이런 결과로 될 줄 정말 몰랐어요.
다 제 생활 때문인 것 같아요. 너무 후회돼요.”
그 말은 내가 알고 있던 병의 언어가 아니었다.
나는 그동안 질환과 수치, 치료 과정에는 익숙했지만, 그 병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삶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때로는 대학병원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환자를 돕는다기보다 병원을 굴러가게 하는 비품처럼 하루를 소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왜 이런 병들은 유독 성품 좋은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걸까? 나는 그 질문을 늘 마음속에만 접어두었다. 그렇게 질문을 미뤄둔 채, 나는 병원을 떠났고, 간호사 가운을 벗은 채 미국으로 왔다.
하지만 병원을 떠났다고 해서 간호사로서의 시선까지 내려놓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 환자가 ‘남의 사람’이 아니라 ‘내 가족’이라는 점이었다. 남편의 "건선"이라는 진단은 암이나 간경화처럼 돌이킬 수 없는 질환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집에 초상이 나도 내 손톱의 가시가 더 아프다는 말처럼,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는 결국 자기 삶의 문제였다. 병원 침대에 누워 검사를 받아야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나는 처음으로 남편의 삶을 하나의 ‘생활’로 보기 시작했다.
무슨 음식을 먹고 사는지, 밤에 잠은 제대로 자는지, 어떤 생각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지, 몸을 움직이기는 하는지. 간호사였던 나는 그동안 무엇을 너무 쉽게 ‘정상’이라고 넘겨왔던 걸까. 걸어 다니고, 통증이 없고, 얼굴빛이 괜찮고, 가정과 사회생활에 큰 문제만 없으면 정상이라고 여겼다. 그게 정말 건강한 상태였을까. ‘정상’이라는 말은 도대체 어디까지를 의미하는 걸까.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비로소 시선을 바꾸게 되었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로서, 아이들의 엄마로서, 조금 거리를 두고 그의 삶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제야 보이기 시작한 것들이 있었다. 충분하지 않았던 수면, 의미 없는 야식, 점점 불러오던 서른 즈음의 배, 움직이지 않고 누워 보내던 시간들. 그동안 눈을 감고 지나쳤던 습관들이 하나씩 또렷해졌다. 병을 보던 눈에서, 삶을 보는 눈으로.
그날 이후, 나는 적극적 치유를 위해 먼저 우리 삶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