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01. 색

by 이별난

트라우마


나에게 존재하는 4가지

색, 맛, 모양, 대상으로 존재


1. 색


♬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수십 년 동안 여기까지가 끝인 줄 알았다. 나에게 이 노래의 끝은 비행기까지였다. 그렇게 내 비행기는 수십 년 동안 날지 못한 채 있었다.


과 거


초등학교 3학년


반장 선거날이었다. "반장 추천할 사람 있어요?"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한 친구가 손을 들었다. 나를 추천한다는 것이었다. 난 원숭이 엉덩이처럼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리고 울면서 뛰쳐나가 양호실(보건실)로 숨어버린다. 선생님이 양호실 문을 여시고 들어오셨다. 난 양호실에서 침대에 걸터앉았고 선생님은 날 다독거리셨다.


미술, 체육이 있던 날. 수요일. 토요일. 기억에 수요일, 토요일이 4교시로 오전수업 끝으로 기억한다. 이 당시 토요일은 대한민국이 일하는 날이었다. 아무튼 난 이 날들 빼곤 학교를 가기 싫어했다. 가기 싫은 날이면 학교 가는 길 중간에 있던 동산에 숨으러 오르고 옆집에 숨어있기도 한다. 간절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옆집 문쯤 따는 건 쉬웠다. 재래식 화장실, 장독대, 창고...... 등 숨을 수 있는 곳이라면 다 숨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 초등학생 꼬리가 길면 얼마나 길겠나. 숨는 족족 밟혔다.


난 이때부터 숨바꼭질을 못했나 보다.


중학교

초등학생 때 욕 한번 했다가 엄청 혼난 기억이 있다. 그 후로 욕을 못했다. 중학교를 갔더니 욕하는 아이들을 보게 되었다. 욕하는 친구가 다가오면 얼굴이 빨개질 준비를 해야 했다. 정체성의 혼란까지 왔다. '왜 나는 욕을 못하는 걸까?' 거울을 보며 연습해 보지만 잘 안된다. 어색한 표정에 큰 마음먹고 하는 말은 "야~띠발!"이었다.


하굣길에 친구와 걸어간다. 어느 정도 걸으면 큰 길이 나오는데 그 지점서 많은 학생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곳까지 나의 벗은 땅이었다. 남녀공학이었는데 그곳까지 여자아이들과 눈이 마주치는 걸 피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난 또 빨개질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소위 '좀 노는 언니'들은 내게 다가온다. 특유의 그 건들거리는 본새로 "승차권 있으면 좀 꿔주라."라고 말한다. 난 결정이 어렵지 않다. 얼른 주고 피했다. 더 있으면 내 빨개진 얼굴과 겁먹은 모습을 몇 초라도 더 공개해야 하는 것이 더 싫었다.


고등학교 1학년


학창 시절 "오늘 27일이니까 27번 읽어보자!"라는 선생님 말씀에 얼굴이 빨개진다. 내 번호는 27번이었다. 이 모습을 친구들에게 들킬까 봐 책으로 얼굴을 가리며 일어나서 땀을 흘리며 읽었다. 그래서 내 번호 뒷자리가 있는 날이면 예습이 장난 아니었다. 그 전날부터 긴장했다. 그래도 날짜로 번호를 지정하시는 선생님이 낫다. 랜덤식 지정방식을 가지신 선생님 수업은 매일 예습해야 한다. 나의 과목 성적은 선생님의 지정 스타일에 달려있었다. 지금도 만나는 친구 중 한 명은 이 모습이 인상적이었는지 나의 첫 모습으로 기억한다.


주도적인 아이들이 접근해 오면 싫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말한다는 것이다. 난 그 눈에 압도되는 기분이 싫어서 다가가지 않았다. 당연히 나에게 말 걸지 않았으면 했다. 말을 걸 때 난 짜증 났다.


성인


얼굴은 여전히 빨개졌다. 숨는 걸 넘어 탓이라는 마음은 고등학교 2학년부터 싹트기 시작했던 거 같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탓이라는 마음은 빨갛게 꽃을 폈다. 얼굴이 빨개지면 그 꽃도 빨갛게 핀다. 나에게 수치심마저 주면 그 꽃은 온몸에 만개하였다. 그로 인해 내가 한 행동들은 말도 안 되는 반대 관점에서 밀어붙이기. 나를 잘 아는 사람들에 대한 기피. 그리고 난 무언가에 중독되길 좋아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싫은 느낌을 주는 것을 숨고 피하는 것을 넘어

좋은 느낌의 것들로 도망가는 현상이 심해졌다.

심지어 싫은 느낌이 드는 것들을 망가뜨려 버리는 현상도 생겼다.


내 얼굴은 빨개졌다 노래졌다 했다. 그걸 아는 친구 중 하나는 바나나처럼 노랄 때면 그냥 맛있게 장난치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수십 년이란 시간이 바나나처럼 길었다. 줄줄이 연결된 이 기차는 중독이라는 놀이터로 빠르게 날 이동시켰다. 그렇게 내가 탄 비행기는 떠오르지 않았다.


현 재


지금도 얼굴색은 여전하다. 긴장되거나 당황하거나 부끄러우면 빨개진다. 그러나 쪽팔리거나 숨고 싶다거나 짜증이 나거나 탓은 하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게 그냥 나의 색인 걸 어쩌겠나. 빨간색을 지우고만 싶어 하던 시간 동안 탓을 했었다. 지우려 했던 건 얼굴의 빨간색이었는데 다른 곳의 빨간색이 지워지고 있다. 탓하는 공격적이고도 부정적인 마음의 빨간색이었다. 그러나 항상 생각하는 건 '이 성향이 어디 가겠어. 꼭꼭 숨어있어 있다가 어느 순간 나오겠지.'이다.


이 노래가 더 이어진다는 것을 레고 놀이터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수십 년 멈추어 있던 비행기는 활주로에 진입해 엔진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LEt's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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