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 빨강, 초록 그리고 하양
수업을 잘 끝내고 나왔다. 수업을 하는 내내 아이들의 눈빛이 봄 햇살처럼 나를 비춰주었다. 아직 계절은 겨울과 봄의 경계에 서있지만 교실만은 분명 봄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참 따뜻했다. 이런저런 복잡한 내 마음의 경계들이 무너지고 편안한 시간이었다.
계절의 순환은 봄을 부르며 산수유 열매를 떨어뜨리고 있는데, 내 마음의 계절은 그렇지가 않다. 지금 나의 선택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다. 시간의 흐름을 맞추려니 사계절이 뒤틀리고, 사계절을 맞추려니 시간이 뒤죽박죽 된다. 흐릿해 보이기만 하는 내 인생의 계절-봄, 여름, 가을, 겨울-이 좀 더 선명해질 수는 없을까?
산수유 열매는 여전히 떨어지고, 그 자리에 노란 꽃이 새롭게 피어나고 있다.
인생엔 두 가지의 계절이 순환하는 듯하다.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때 맞는 양지의 계절.
타락의 길을 걸을 때 오는 음지의 계절.
두 계절 속에서도 시린 겨울은 찾아온다. 그러나 어둡고 힘들다고 해서 같은 것이 아니었다.
삶의 어둠이 끝없이 이어질 때. 언젠가, 빛을 만나게 되는 긴 터널일 수도 있고, 가도 가도 칠흑 같은 어둠만이 펼쳐지는 동굴일 수도 있다. 나는 타락했고 앞날이 꽉 막힌 동굴에 들어갔다. 음지의 계절은 그곳에서 뱅뱅 돌기 시작한다. 어둠이 내 주위를 도는 건지, 내가 돌고 있는 건지 구분이 안 간다.
그 동굴 입구에 서있던 날이 불과 1년 전인데 마치 몇 년이 지난 듯하다. 하루에도 수십 번, 시간이 천천히 흐르다가 갑자기 빨리 흐르며 사계절이 제멋대로 돈다. 하루에도 수십 번의 봄과 겨울이 오는 날이면, 이 변덕스러운 날씨에 정신을 못 차린다. 돈을 따고 잃으며 겪는 감정의 기복은 나를 정신없는 시간 속에 갇히게 한다. 그러다 한 계절이 꽤 오랫동안 지속될 때가 오는데, 지금 난 겨울 속에 파묻혀 있다. 이런 음지의 계절을 어떻게 탈출해야 될지 모르겠다.
현실을 도망 다니며 하루 종일 도박만 생각하고 산지가 벌써 1년 반이 흘렀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며 갇힌 겨울이 올 초 봄에도 이어졌다. 그러던 지난봄, 지안엄마는 돈이 없어 소리를 치며 땀범벅이 된 나에게 지안이 통장에서 10만 원을 보내주었다.
도박중독임을 그때 알았다. 사이트를 여는 순간 거짓말처럼 불안했던 마음은 금세 안정화가 된다. 지안이가 나를 살린 걸까? 그날부터 지금까지 잃은 날이 단 하루도 없다. 쌓였던 눈이 녹는다 싶더니, 쌓였던 빚을 다 갚고도 현금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내 인생의 벚꽃이 휘날리는 꿈을 꾸는 듯한 날을 맞이했다.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돈이 마르지 않고 있다. 몇 백을 써도 단 30분이면 오히려 돈이 불어나고 있다.
오늘도 이 새벽에 500만 원을 따고 집에 와 거울을 보는데 갑자기 또 뭔가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요즘, 거울을 보면 내가 아닌 거 같다. 이런 느낌이 계속 찾아온다.
아빠, 사위, 남편, 아들.... 등 내가 가진 많은 호칭들을 다 떼어내 버리고 싶은 마음이 순간 치솟을 때가 계속 찾아온다. 이 순간에도 도박 생각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역겹다. 내 삶의 자세가 아이들에게 선생님 소리를 들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지국 운영을 할 자격이 없다. 그러다가 결론을 '그래 안 듣고 안 하면 되지'라는 내가 번갈아 보이기 시작한다.
계절이 흐름대로 제때 바뀌어야 하는데 이 쾌락과 착각의 봄햇살이 너무 오래 지속되고 있다. 도박, 술, 여자... 온갖 쾌락의 하루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도 글을 쓸 때뿐이다. 펜을 놓는 순간 난 또다시 모든 걸 잊고 쾌락의 계절에 묶인다. 그런데 이 쾌락의 계절을 벗어나고 싶지 않다. 이 계절이 영원히 지속되면 좋겠다.
내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환상인지 실제인지 구분이 잘 안 간다. 난 대체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이 봄을 어떻게 탈출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작년 초 겨울의 끝자락에서 엽록소를 주제로 어린이집에서 수업을 했던 것이 떠오른다. 아이들과 수업을 하고, 끝나고 나와 떨어진 산수유 열매를 봤을 때, 잠시 희망의 빛을 받았었다.
만약 내가 나뭇잎이라면, 내 삶의 의미와 방향을 초록해지게 할 충분한 빛이었다. 그러나 난 초록을 받아들이지 못한 나뭇잎이었다. 태양의 빛을 받는 나뭇잎처럼, 내 안에서 빛을 받아들일 힘이 없었다.
마음속에 삶의 엽록소도 부족한 놈이 어느 순간부터 오히려 빛을 등졌다. 당시 나는 현실에 직면한 문제들에 용기가 없어 맞서지 않았고, 두려워 떨며 도망쳤다. 내 안에 삶의 용기와 힘이 필요했었다.
엽록소는 세상을 살아갈 용기이자 힘이었다. 내가 성장하려면, 그 길이 고되더라도, 나는 그 빛의 방향으로 갈 용기와 힘을 키워야 했다. 그 힘이 부족하더라도 내가 걸어가야 할 곳은 태양빛을 바라보는 양지의 계절이었다. 하지만 나는 한없이 약했고, 빛나는 계절을 따라잡지 못하고 이 음지의 계절을 돌고 있다. 대체 이 계절을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 모르겠다. 난 이렇게 또 펜을 놓는다.
잎이 빨갛게 옷을 갈아입고 있다. 산수유가 빨간 열매를 맺고 있다.
난 결국, 초록해지지 못한 채 인생이라는 나무에서 떨어졌다. 이제는 주변에 나를 봐주는 관객이 아무도 없다. 함께 아이디어를 나누던 선생님들도 대부분 퇴사를 했고, 내 수업을 들어줄 아이들도 없다. 지안엄마도, 지안이도 내 곁에 없다. 그들이 내 곁에 있을 때, 소중함을 느꼈어야 한다.
마치 산수유가 계절을 순환할 때 노랑과 빨강이 함께 필요하듯, 그들이야말로 내 삶이 계절을 돌 때마다 함께 했어야 했던 사람들이었다.
초록만으로는 완전하지 않았다. 초록만 강조했던 수업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했어야 했다. 그날이 불법도박이라는 어두컴컴한 동굴 입구에서 등을 돌릴 마지막 기회였다.
결국 난 들어갔다.
어느 정도까지는 아직 입구의 빛이 꺼지지 않고 새어 들어오는 구간이 있다. 그때라도 되돌아 나오면 됐다.
빛이 보이지 않아도 아직 방향감각이 있는 구간이 있다.
어둡더라도 왔던 방향으로 그대로 나오면 됐다.
기회는 생각보다 꽤 많게 이어졌다.
그러나 끊임없이 무언가를 좇아 도망가며 헤매다 보면 깊은 어둠 속에 갇혀 이제 어디가 어딘지 모르게 된다. 그리고 많은 것들을 볼 수 없게 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는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부족한 엽록소엔 더 이상 한 줌의 빛도 비치질 않고 삶에 대한 시야는 흑빛 도박에 눈이 멀고 말았다.
잊고 살았던 노랑이와 빨강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지금, 나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이제는 관객 없는 인형극을 다시 한다.
"도중아, 도중아, 왜 그때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하지 않았어?"
(노랑이가 나에게 물어보며)
".......(눈물이 맺히며)"
"네가 관심을 안 줘서 말할 틈이 없었는데 이제야 말해주네.
노랑이 얘 이름은 따뜻한 삶의 희망!
빨강인 내 이름은 열매이자 삶의 결실! 이야.
그리고 용기 있는 엽록소 초록의 또 다른 이름은 삶의 힘!이었어."
빨강이가 이름들을 말해주는데 난 결국 참을 수가 없었다.
"으아아아~(눈물을 쏟아내며)"
산수유 열매 위에 하얀 눈이 쌓인다. 이 겨울을 이겨내고 또다시 봄을 맞을 것이다. 돌아보면 나도 작고 예쁜 삶의 결실들도 많았다. 물론, 그 위에 역경과 고난이 내려앉을 때도 많았다. 그래도 그걸 또 이겨내며 봄을 만들어왔다. 그렇게 나름 계절의 순환을 돌고 있었다.
그러나 2년 전부터 그 순환이 멈춘 듯하다. 도박에 미쳐서 놓치고 못 본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고 나니 겨울인 것도 모자라, 이 계절이 내 삶의 끝인 것만 같다. 전화기를 쳐다보지만 쉬이 걸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없다. 머리 위에 그들과 함께 한 시간들이 눈 내리듯 쏟아진다.
하얀 눈.. 하양이... 2년 전 그 겨울, 난 다가올 봄만 생각했다. 봄같이 따뜻했던 교실. 난 그곳에 있던 노랑이, 빨강이를 무시했고, 하양이는 있는 줄도 몰랐다.
"도중아, 그리고 그때 너 머리 위에서 서서히 내려오고 있던 하양이도 있었는데 알고 있었어? 자기소개하고 싶어 했는데 수업이 끝나서 기회가 없던 걸 아쉬워했었어."
(빨강이가 나에게 말하며)
"도중아, 하양이가 나중에 너 만나면 꼭 자기 이름정도는 말해달라고 했어."
(노랑이가 내 마음의 귀에 대고 말을 하며)
"도중아, 하양이 이름은 말이야..."
감은 두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눈물의 무게가 소리 없이 새어 나와 두 뺨을 타고 조용히 흘러내렸다. 눈물에 녹아 흐르는 하얀 눈송이가 이제야 흐릿하게 보인다. 이제야 내 머리 위에 내리는 하얀 눈이 보이는 듯한데, 보지 못했던 눈이 이미 턱 밑까지 쌓여있다. 너무 춥고 외롭다. 숨쉬기가 버겁다. 과연 내가 이렇게나 쌓인 눈을 녹일 수 있을까?
나의 타락한 마음과 미친 행동들이 음지의 계절에 수없이 내리기 시작했고, 이 상황에 나를 파묻히게 했다.
하양이는 결국, 나였다. 이 모든 것이 나의 탓이었다. 내가 가진 많은 가치관들이 하얗게 바닥에 떨어졌고, 나의 존재를 파묻은 건 결국 나의 마음, 행동이었다.
이 마음과 행동이 하루에 쌓이고, 한 달에 쌓인다. 그렇게 또 1년이 차곡차곡 쌓인다. 난 이 땅 위에 중심을 잡고 이 푸른 지구와 함께 계절을 돌았어야 했다.
대체 깨어져버린 이 계절의 파편들을 어떻게 붙여나가야 할지 모르겠다. 여전히 이 세상에는 겨울의 눈이 내리고 있다.
2년 전 그 교실에서처럼 숨 한번 제대로 쉬고 싶다.
.
.
살고 싶다.
.
.
노랑, 빨강, 초록 그리고 하양
.
.
그때 봤던 산수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