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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Sep 25. 2023

오랜만의 피아노 연주회

지난 토요일 저녁에 피아노 학원에서 미니콘서트가 있었다. 나는 성인전문피아노학원에 다닌다. 항상 개인 레슨만 받았는데, 우연히 무료 레슨을 한 번 받아보고는 여기로 마음을 정했다. 일단 레슨의 내용이 너무 좋았고 내게 딱 필요한 부분이었다. 오랫동안 가르쳐 주신 선생님께는 죄송하지만 우리 선생님보다 여기 원장님이 더 쉽고 정확하게 가르쳐 주셨다. 그래도 원래 선생님과는 좋은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다. 다만 아직 다른 데서 레슨 받고 있다고 차마 말씀은 못 드렸다....


어쨌거나 석 달 남짓 되었는데 학원에서 문자가 왔다. 토요일에 와인과 함께 하는 미니콘서트가 열리니 참가하고 싶으면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나는 집회에 참석하느라 경황이 없어 미니콘서트는 뒤로 쑤욱 밀어놓았다가 지지난 주 다시 레슨을 받으러 가면서 생각이 났다. 하이든 소나타는 좀 어려울 것 같고 브람스의 인터메쪼는 조금 더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 이 주 넘는 시간 동안 특훈을 받았다. 박자 다시 잡는 것부터 레가토 연결하기, 엄지손가락 소리를 자연스럽게 내는 방법과 자연스럽고도 깔끔한 페달링 등등 기본 연습을 한 다음에서야 루바토에 들어갔다. 낭만시대의 곡은 프레이즈가 자유로워서 이야기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는 선율의 흐름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사이사이 정점을 향해 가면서 어떻게 점차적으로 빨라지고 느려지는지, 한 마디 안에서도 길이와 흐름을 어떻게 배분해야 하는지, 아주 그냥 끝이 없었다. 이래서 연주를 하겠나 싶었지만 선생님은 괜찮다고 하셨다. "어차피 저희끼리 즐기려고 하는 건데요 뭐."


그래. 그 한 마디가 참 좋았다. 내가 꼭 완벽한 연주를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다만 듣는 이의 마음을 고려해서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지가 관건인 것이다. 조성진의 연주를 수없이 들으면서 그 흐름을 따라가려고 했다. 선우예권의 연주도 좋았다. 보통 다른 대가들의 연주를 들으면 자기의 색을 잃어버린다고 하지만 나는 아예 색이랄 것도 없다. 기본을 따라 할 수 있어야 나만의 색채도 가질 수 있는 거 아닌가? 연주 전날까지도 열심히 연습을 하고 당일이 되었다.


당일은 바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셋째 야구 시합에 따라가야 했다. 오전 내내 경기를 흙먼지를 맞으며 경기를 보다가 집에 오니 힘들었다. 밥 해주고 잠깐 눈을 붙인 후 일어나 청소하고 다시 밥을 했다. 나까지 밥을 먹을 정신은 들지 않았다. 아이들 밥 차려주고 부랴부랴 화장을 하고 (그래봐야 눈썹과 입술- 나는 아이섀도와 마스카라는 하지 않는다), 깔끔한 정장 검은 바지에 화이트 민소매 탑을 입고 나섰다. 아이들이 옷을 봐주었다. 검은색과 흰색 둘 다 보더니 흰색이 낫다고 했다. 차 막힐까 봐 대중교통으로 가는데 오늘따라 버스는 늦게 도착이고 지하철은 방금 떠난 데다가 왜 역마다 오래 서 있는 거지??? 그래서 정말 아슬아슬 10분 전에 도착했다.


그랬으니 리허설은 뭐 할 수도 없었다. 집 나서기 전에 한 번 딱 친 것이 오늘의 연습 전부이다. 모차르트 소나타로 시작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연주를 들으면서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계속 긴장이 되었는지 손끝이 차가워지면서 땀이 났다. 듣기 좋은 뉴에이지 음악도 있었다. 그리고 중간에 내 순서. 와인을 두 모금 마셔도 긴장이 해소는 안 되었는데 그냥 편하게 치자 싶었다. 이제 와서 뭐. 하도 쳐서 그런지 손이 자동으로 진행이 된다. 관객은 의식이 되지만 음악에 좀 더 집중했다. 놓친 것도 있고 틀린 부분도 있지만 그냥 넘어간다. 중요한 것은 진행이다. 그리고 이 정도면 연습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 드는 마지막 마무리.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히히.


자리에 돌아와 앉으니 앞에 앉으신 분이 "연구를 많이 한 연주인데요."라고 말해주셨다. 옆자리 분도 "연주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나중에 뒤에 뒤에 앉으신 분이 오셔서 "정말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꼭 말씀드리고 싶어서 일부러 왔어요."라고 해 주셨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 그리고 동시에 엔도르핀이 팡팡팡. 연주를 하면서 얻는 기쁨 플러스 예상치 못한 칭찬과 격려까지. 더 열심히 생각하고 연습해야겠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드는 것이다. 이후로는 한결 더 편안하게 즐길 수 있었다. 확실히 빨리 지나가는 것이 좋긴 하다.


공식 순서가 다 끝난 다음엔 다과를 나누면서 이야기를 했고, 우리 테이블 분들 너무 좋았다. 상당수가 98이었는데.... 98년생들인 것이다. 이런. 나는 98학번이다.... 흑흑. 차별대우 없이 아줌마랑 이야기를 나누어준 꽃다운 청춘들에게 감사하다. 대화를 하다가 즉석 연주도 하면서 즐기고, 이런 것이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임인가 싶었다. 그동안은 항상 무대에서 관객들이 있는 연주회만 참석을 했는데 이렇게 연주자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연주하는 모임은 처음이라 더 즐거웠다. 그 바람에 생각보다 조금 더 오래 머물러 집에 늦게 들어왔고, 오랜만에 마신 와인의 여파로 나는 바로 쓰러져서 잠을 잤다. 혼자서만 치다가 들어주는 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쳐보니 역시 음악은 나누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좋다. 12월에 정기연주회 있다는데, 다음엔 무슨 곡을 쳐 볼까. 슈베르트 D845 1악장이나 쇼팽의 녹턴 48-1번이 치고 싶은데 둘 다 너무 대곡이라 어쩔지 모르겠다. 일단 내일모레 있을 레슨에서 지금 치는 곡들 마무리를 잘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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