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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Dec 15. 2023

2년 만에 폭식하게 된 이유

나는 간식을 잘 안 먹는다. 안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안 먹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작년 봄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다가 여름에 식단도 같이 관리하게 되었다. 가끔씩 먹던 과자류를 잘 먹지 않았다. 커피도 많이 줄였다. 과도한 당과 과도한 카페인이 몸에 좋지 않은 이유를 제대로 알게 되면서였다. 


하지만 나는 수시로 먹어 주어야 하는 타입이다. 저혈압이라서 서너 시간에 한 번씩은 뭐라도 먹어 주어야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심한 경우는 손이 떨리고 초조해지는 증상까지 있어서 아무것도 안 먹기는 정말 힘들었다. 아침을 7시 반 정도에 먹고 나면 급식은 1시에나 먹을 수 있으니 5시간 반의 공복을 그냥 견디기는 불가능했다. 생각해 낸 것이 견과류였다. 3교시가 끝나면 견과류에 가끔 요거트 정도를 섞어 먹었다. 영어 교과 전담일 때는 그게 가능했는데 담임이 되니까 너무 힘들었다. 아이들에게 설명했다. 중간에 뭔가를 먹지 않으면 제대로 수업을 하기가 힘들어 간단하게 먹어야 할 때가 있는데 양해해 달라고. 그래도 아이들 보는 앞에서 먹는 것은 가능하면 참고 있다. 오늘은 교과 시간이 4교시에 있어서 간단하게 커피 쿠키 하나와 커피를 먹었다. 견과류가 다 떨어졌는데 먹을 것이 마땅치 않았다. 


확실히 당과 카페인이 들어가니 남은 두 시간을 견디기가 쉬웠다. 점심을 조금 더 오래 천천히 먹었다. 나 혼자 먹고 있고 아이들은 선생님이 언제 다 식사를 마치나 자꾸 몸을 기울여 나를 본다. 내 앞에서 같이 천천히 먹는 ㅈㅇ이는 오늘 머리가 아프다고 5교시가 끝나고 조퇴했다. 올해 처음으로 아이들을 먼저 올려 보내면서 곧 따라갈 테니 자기 자리를 정리하고 집에 갈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래봐야 3분 정도 식당에 더 앉아있었을 뿐이지만 꼭꼭 씹어 먹으니 좋았다.


교육과정 시수를 조정해서 남은 3주 동안 금요일은 5교시 수업이다. 아이들을 보내고 다시 학급 문집 편집을 한다. 문집을 편집하다 또 학년말 업무를 하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현저하게 기운이 떨어진다. 2주 가까이 문집을 편집한다고 성적을 처리한다고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었던 탓이다. 그런데 먹을 게 없다. 교실 서랍을 뒤지다가 아이들에게 선물로 주려고 사 둔 초코파이를 하나 꺼내서 먹었다. 마지막으로 초코파이를 먹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잘 안 난다. 하나 먹고 일을 하다가 또 하나를 꺼내서 먹었다. 믿을 수가 없다. 초코파이를 한 자리에서 두 개나 먹다니. 그런데 또 먹고 싶은 것이다. 이번에는 참아 본다. 출판업체와도 통화를 마쳤다. 월요일 오전까지 업로드하면 어찌어찌 될 것 같기는 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90퍼센트는 끝내 놓아야 한다. 싫지만 내일 한 번만 더 토요일에 학교를 나오자. 6시 정도 되니까 이젠 정말 더 이상 못하겠다. 마지막으로 할 일들 조금 더 준비해 놓고 교실을 나서는 시각이 6시 44분. 옆반 선생님은 아예 9시 40분까지 초과근무를 하기로 하셨다고. 나는 초과근무도 안 올렸는데.... 뭐 누가 늦게까지 일하고 싶어서 일 하나요... 하면서 먼저 학교를 나섰다. 


보통 이렇게 간식을 먹으면 저녁을 따로 먹지는 않았다. 이미 하루에 필요한 칼로리를 충분히 섭취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안 좋은 것은 알지만 사실 배가 고프지는 않기 때문에 견딜만하다. 그런데 집에 치킨이 남아 있었다. 사실 그리 입에 맞는 치킨도 아니었는데 그냥 홀린 듯이 먹고 있었다. 먹을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자리에 앉지도 않고 서서 먹었다. 내친김에 한편에 올려져 있던 현미밥도 반 그릇 먹고 평소에는 손도 안 대던 치킨무 남은 것도 싹 다 먹었다. 치킨은 한 여섯 조각 정도 먹은 것 같은데 남은 게 그뿐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한 상자가 가득 남아 있었다면 그대로 다 먹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막둥이가 보드 게임을 하자고 왔다. 보드 게임을 하는데 식탁에 신랑이 사 온 고구마크림번이 보인다. 역시 평소에는 안 먹는 것이다. 한 입 잘라먹었다. 몸에서 그냥 쭉쭉 흡수하는 것이 느껴진다. 한 조각 더, 한 조각 더... 하다 보니 어느새 반을 먹어 버렸다. 더 먹을 수도 있었는데 역시 아이들이 울상이 되어서 못 먹었다. 냉장고를 뒤지고 팬트리를 뒤지는데 정말 먹을 것이 없었다. 간식을 많이 먹는 집이 아니기 때문에 먹을 것이 없었고 오늘따라 과일도 똑 떨어졌다. 나는 슬펐다. 왜 먹을 게 없지.....


그래서 쿠팡 앱을 열어 귤을 한 상자 주문했다. 다른 것도 기웃거리는 나를 발견하고 재빨리 귤만 결제하고 앱을 닫았다. 셋째 넷째랑 영어공부를 마치고 나서 잠깐 누워 있으려니 정신이 들었다. 아. 나 지금 무리하는구나. 왜 사람들이 폭식하는지 알 것 같았다. 너무나 과도하게 일을 해야 할 때,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할 때 우리 몸은 대신해서 에너지를 채워줄 뭔가를 요구한다. 가장 손쉽게 채울 수 있는 것이 먹을 것. 잠을 잘 수도 없고 일을 쉴 수도 없으니 일단 먹기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종일 앉아만 있으니 배부르게 먹기보다는 적게 먹어도 칼로리가 높은 것을 먹고 싶은 것이고. 보통은 절제라도 할 텐데 직성이 풀릴 때까지 그냥 마구 먹어대는 것이다. 이 와중에도 먹으니 마음이 좀 여유로워지고 풀리는 것을 느껴져서 좀 어이가 없었다.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 요 며칠 집에 와서도 계속 일을 했더니 쉬어도 쉰 게 아니었다. 내일까지 조금만 더 하면 큰 고비는 하나 넘길 수 있을 것 같아 약간은 설레기까지 한다. 


폭식하면 그날 즉시로 운동해야 하지만 오늘은 건너기로 한다. 운동 대신 눈 감고 지금 바로 자는 게 제일 나을 것 같다. 대신 내일은 차 없이 걸어서 출근해야지.



댓글로 응원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원래도 정신없는) 제가 월요일까지만 조금 더 정신없이 지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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