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렸다. 그동안 몇 번 눈이 내렸다는데 나는 일하다가 놓쳤고 이야기만 들었다. 눈길을 제대로 걸은 것은 오늘이 처음이라 꼭 첫눈 같은 느낌이었다. 오늘 내린 눈은 반짝반짝 예쁜 눈이었다. 공기 중에 습기가 많으면 이렇게 유독 반짝이는 눈이 내린다. 이런 눈은 잘 뭉쳐지지 않고 쉽게 부스러지는데 또 그만큼 더 많이 미끄럽기도 하다. 이렇게 예쁜 눈은 자주 내리는 편은 아니라서 조금 더 시선이 갔다. 저녁 길이라서 서서히 어두워진 길에 가로등 불빛을 받아 더 반짝인다.
그래. 22년 전 그 겨울에도 이렇게 예쁜 눈이 내렸었더랬다. 그날의 그 저녁 어스름한 풍경 속 가로등에 반짝반짝 빛나던 예쁘게 쌓인 눈이 기억난다. 첫사랑과 종교 문제로 헤어졌다 만났다를 반복하던 그 힘든 시기, 그는 나에게 잘해 보겠노라고 하면서 초록색 상자에 한가득 초콜릿과 사탕을 넣어서 주고 내 동생의 것까지 작은 상자를 주었다. 그 눈이 내리던 길을 그와 함께 걸어서 왔다. 그의 그 간절했던 눈빛과 마음은 잊고 있다가도 이런 눈이 내리는 날에는 그냥 떠올랐다. 그런 날도 있었지...라고 생각하며 아이 문제집을 사 가지고 집에 왔다.
서점에서 다녀오니 학원에서 돌아온 둘째가 피자를 먹고 있었다. "엄마 나 태워다 주면 안 돼?" 이유인즉슨 학원에 숙제해야 하는 교재를 놓고 왔다는 것이다. 차로 가면 5분이지만 걸어가면 왔다 갔다 20분은 넘게 걸린다. "안 돼. 눈이 오잖아." 큰길은 염화칼슘도 뿌렸고 차들이 많이 다니니 녹아서 괜찮지만 주차장에서 정문까지 가는 길은 눈이 엷게 쌓여 있다. 이런 때 사고가 잘 난다. 조심조심 운전하다 보면 오히려 시간이 더 걸린다. "그 대신 엄마가 같이 가 줄게. 같이 걸어갔다 오자." 둘째는 살짝 툴툴거리면서도 기꺼이 옷을 입는다. 평소에는 손을 꼭 붙잡고 가는데 오늘은 미끄러우니까 둘 다 조심조심 뒤뚱뒤뚱 펭귄처럼 걸어갔다. 다 내려왔다고 생각한 순간 둘째는 꽈당 넘어졌다. "엄마도 어릴 때 그랬어. 큰길까지 다 왔다 생각하는 순간 꽈당 꽈당 두 번이나 넘어졌지." 우리는 까르르 웃었다.
예쁘게 눈이 내리던 저녁과 밤. 이제는 둘째 딸과 함께 까르르 웃으면서 걸었던 시간이 더해진다. 첫사랑과 걸었던 그 눈 내리던 저녁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둘째 딸과 휘청이기도 하고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걸은 눈 내리는 밤 시간이 같이 떠오르겠지. 어쩌면 먼저 떠올라 아련한 기억이 아니라 행복한 웃음의 기억으로 회상될 수도 있겠다. 눈길을 함께 걸어주는 엄마가 있고 함께 걸어갈 딸이 있어서 마음이 꽉 채워지는 밤이었다.
한참을 안 나오길래 핸드폰을 확인하니, "선생님이 그냥 여기서 다 풀고 가래! 엄마 먼저 가!" 그래서 조금 쓸쓸하기도 하고 호젓하기도 한 기분으로 다시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