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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Mar 06. 2024

우리 반에 이름을 줍니다

몇 학년 몇 반. 이것이 보통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가끔씩 학교 복도를 다니다 보면 OOO 4학년 1반 이렇게 다른 단어가 붙어 있는 반들이 있었다. 그냥 넘겼다. 기억에 남는 이름도 있었는데 5학년 3반이었다. 오삼불고기 반이라는 그 반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 재미있는 이름이었다. 그래도 별다르게 이름을 부여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았다. 그러다 작년 말에 학급문집을 완성하고 아이들에게 표지 공모전을 열었다. 그 때야 확 와닿았다. 우리 반에 이름이 없으니 그냥 6학년 O반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평범한 제목의 표지가 만들어지고 만 것이다. 일 년 내내 이름 없이 지내다가 갑자기 이름을 짓는 것도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그때 생각했다. 새롭게 반을 맡게 되면 이름을 지어야지.


이름을 지을 때는 보통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선생님이 가치롭게 생각하는 단어를 넣는 것이다. 초등학교 글쓰기 교육으로 잘 알려지신 이영근 선생님 반은 참사랑땀이라는 가치를 가지고 참사랑땀반으로 이름을 지으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선생님은 무슨 반 O기 하는 식으로 제자들마다 1기, 2기,...로 기수를 부여하시기도 한다. 나도 기수를 부여해 보고 카페에도 게시판을 만들어 보기도 했는데 해 보니 나와는 잘 맞지 않아서 첫 학교 이후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또 육아 휴직 기간이 길어지면서 이렇게 기수를 부여하는 것도 애매해져 버렸다. 반의 이름을 짓는 또 다른 방법은 학생들이 제안하고 함께 의논하여 정하는 것이다. 어제 아이들에게 우리 반에 어떤 이름을 붙이면 좋을지 생각해 보라고만 알려줬다. 그리고 사실 이에 관한 에피소드도 하나 들어서 알고 있는데 미리 말해 주면 그 생각만 날 테니 이름이 정해지고 나면 이야기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퇴근해 보니 막둥이가 종이를 하나 들고 왔다. 반 이름 짓기에 관한 안내문이었다. 4학년이 된 막둥이네 반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순우리말 사전을 찾아보면서 두 글자에서 네 글자 사이의 단어를 찾아볼 것을 권하셨다. 가족끼리 함께 찾아보고 왜 그 단어가 반 이름이 되면 좋겠는지 이유를 적고 함께 의논한 가족들은 누구인지도 적어 보라고 하셨다. 정말 좋은 걸? 사실 나는 좀 귀찮았지만 선생님의 숙제이니 막둥이와 함께 '예쁜 우리말'이라고 검색어를 입력한 후 뜻을 살펴보면서 마음에 드는 단어를 고르고 적었다. 그리고 오늘 하이클래스에 '다솜 4학년 O반'이라는 명칭이 뜬 것을 보니 사랑을 뜻하는 '다솜'이 선정된 모양이다.


둘째 날 아침. 나는 아이들에게 오늘의 중요한 두 가지 활동은 이름 정하기와 둘레 정하기라고 알려주었다. 우선 이름부터 정해 보기로 했다. 사실 어제 아이들에게 생각해 보라고 말은 했지만 별달리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진지하게 생각을 해 왔다고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아이들 전체에게 종이를 한 장씩 주고 자신이 생각한 우리 반에 어울리는 이름과 이유, 그리고 자기 이름까지 적도록 했다. 갑자기 고민이 된다는 아이도 있어서 오삼불고기 이야기를 해 주었다. (하지 말 것을....)


예쁘고 좋은 이름들이 많이 나왔고 뜻도 좋았다. 그라운드63, 별빛콩, 콩나라, 어울반, 푸르미르, 파란장미, 보들보들, 최강, 배려, 그리고....육삼불닭이 나왔다. 그냥 그게 생각이 났다고 했다. 아이들은 빵 터졌다. 일단 두 가지씩 적어 보기로 했다. 푸르미르와 육삼불닭이 호각을 이루었다. 그래 봤자 다른 이름들보다 2표 정도밖에 많지 않아서 7개 정도의 이름을 다시 추려서 우리는 재투표를 하기로 했다. 


재투표에는 하나만 적기로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압도적으로 푸르미르가 나왔다. 아이들 말로는 육삼불닭이 웃겨서 그냥 한 번 적어봤는데 이렇게 많이 나올 줄 몰랐다고 했다. (가끔 학급 임원 선거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푸르미르는 올해가 푸른 용의 해이기도 하고 자기들이 용띠이니 용의 기운을 담아서 활활 펼치자고 이렇게 지었다고 했다. 그래서 물어봤다. "그런데 너네는 흑룡 아니니?" 아이들은 갑자기 당황했다. "블랙미르가 더 맞겠는데? 아니면 검은미르? 까망미르?"


이번에는 미르는 그냥 두고 수식어만 바꾸자는 의견이 나왔다. 검푸르미르, 푸르미르, 블랙미르, 까망미르를 두고 투표를 했다. 아이들 반 정도가 블랙미르를 선택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반은 영어와 순우리말이 섞인 원래의 의도와는 조금 변질된 혼합어를 반 이름으로 갖게 되었다. (6학년 국어 단원에 우리말을 아끼고 사랑하자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때 우리는 괜찮을 것인가....) 내가 걱정을 하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신나서 이름이 블랙미르이니 반티도 블랙이어야 한다고 했다. 반티 색상을 뽑을 때 열심히 노력해 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반을 상징하는 로고도 그려와 주면 좋겠다고 했다. 저작권에 위배되지 않게 손그림도 괜찮고 그림판 그림도 괜찮다고 알려주고 기한은 넉넉하게 월요일까지 주었다. 그림 좋아하는 아이들, 뭔가를 시도해 보고 싶은 아이들의 눈빛이 반짝인다. 그냥 평범했던 6학년 3반에 부여된 이름에 더 빠르게 소속감을 느끼는 것이 눈에 보인다.


새 학년 두 번째 날. 아이들은 서로서로 가까워지려고 힘껏 노력한다. 그렇게 하나가 되어서 행복한 학급에서 안정된 마음으로 한 해를 보내려고 정말 온 힘을 다해 애를 쓰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매일매일 오늘만 같으면. 그리고 어제와 같으면. 그렇게 끝까지 채워진다면 정말 좋겠다고 퇴근하는 길 저녁 해를 바라보며 감사한 마음으로 학교를 나섰다.




참. 아이들이 들려달라고 한 이야기는 다른 브런치 작가 선생님의 금쪽같은 우리반 이야기였다. 금쪽은 원래 좋은 것이니까 금쪽이라고 했지만 정말 금쪽이들이 되어 버렸다는 선생님의 슬픈 어조가 어쩌면 그렇게 마음에 와 닿았던지. 그 순간 어떤 아이가 "사실 나 금쪽이반으로 할까 생각했었다."라는 말에 정말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블랙미르라는 이름에도 사실 염려가 되는 부분이 있지만 절대 활자화하지 않으리라. 그냥 푸르미르로 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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