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대학원에서 영미문학 강의를 듣던 때였다. 교대에도 놀랍게 '과'가 존재한다. 물론 졸업장이나 학생증에는 '초등교육과'라는 하나의 명칭이 찍히지만 그 안에는 심화과정이라고 해서 열몇 개로 나뉜 고가들이 있다. 국어와 과학, 사회 같은 과는 A, B로 해서 두 개씩 있고 영어나 음악 같은 과들은 한 개씩 있었다. 나는 영어교육과, 정확하게 말하면 초등영어교육과이다. 그래봐야 몇십 학점만 영어교육 관련이지만 그만큼 조금의 전문성이 더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그렇게 교육 관련 학문들과 실기 과목 위주로 공부를 하다가 4학년이 되어서 처음으로 영미문학개론 강좌를 들을 수 있었다. 나에겐 마치 물을 만난 것 같았다. 영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만난 이 강의를 들으면서 알았다. 나는 영문학이 공부하고 싶구나.
대학원 역시 교육대학원을 갔지만 중등 선생님들도 같이 공부하는 대학원인지라 강좌의 선택 폭이 넓었다. 거기서도 영미문학 관련 강의들을 매 학기 들으면서 갈증을 달랬다. 그때도 지금도 내가 가진 꿈들 중 하나는 영문학을 공부하는 것이다. 제대로. 아이들을 조금만 더 키워놓고 내 손길이 필요한 막내를 조금 더 키워 놓고 나면 50대를 넘어서 있겠지만 편입이든 야간이든 방통이든 영문학을 공부하겠다는 꿈은 비워낸 적이 없다.
그 20년 전 읽은 한 단편 소설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했다. 언덕길을 오르고 내리고 이리저리 구불거리며 돌아가는 트램을 타고 내린다. 교수님이 질문하셨다. "이 문장의 뜻이 뭘 담고 있는 것 같나요?" "삶의 굴곡과 다양한 모습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 당시 나는 막내였기 때문에 조금 더 귀여워해 주셨다. "어떻게 갓 졸업한 신규 교사가 이런 것을 볼 수 있지?" 그때는 그냥 칭찬을 들어서 쑥스러웠을 뿐인데 살아보니 정말로 삶은 그랬다. 올라가는 길은 어려웠고 내려가는 길이라고 쉬운 것은 아니었다. 단편 소설의 작가명도 주인공들의 정확한 이름도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문장만은 마음속에 콕 박혀서 삶이 어려운 순간순간마다 문득 떠올랐다.
5월 어린이날 연휴 동안 아들을 따라가 홍천에 머무르면서 이금이 작가의 '알로하 나의 엄마들'을 읽었다. 조금 더 길게 서사가 펼쳐지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여전히 이금이 작가님의 그 필체는 매력적이었다. 하와이 이민 초기의 어려운 삶을 그려낸 책. 책의 마지막 부분으로 다가가면 파도타기 하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부분이 나오고 이런 문장이 나온다.
"저 아들이 꼭 우리 같다. 우리 인생도 파도타기 아이가."
홍주의 말대로 자신의 인생에도 파도 같은 삶의 고비가 수없이 밀어닥쳤다. 아버지와 오빠의 죽음, 그 뒤의 삶, 사진 신부로 온 하와이의 생활....... 어느 한 가지도 쉬운 게 없었다. 홍주와 송화가 넘긴 파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젊은이들 뒤로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파도를 즐길 준비가 돼 있었다. 마다가 있는 한, 없어지지 않을 파도처럼 살아 있는 한 인생의 파도 역시 끊임없이 밀어닥칠 것이다.... 함께 조선을 떠나온 자신들은 아프게, 기쁘게, 뜨겁게 파도를 넘어서며 살아갈 것이다. 파도가 일으키는 물보라마다 무지개가 섰다.
여기서 너무 감동적인데!!! 버들과 홍주, 송화가 1세대라면 딸인 펄은 2세대이다. 펄이 그리는 모습은 이렇다.
우리는 비를 피하지 않았다. 하와이에 산다면 이런 비쯤 아무렇지 않게 맞아야 한다.
아스라이 펼쳐진 바다에서 파도가 달려오고 있었다. 해안에 부딪힌 파도는 사정없이 부서졌다. 파도는 그럴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나도 그렇게 살 것이다. 파도처럼 온몸으로 세상과 부딪히며 살아갈 것이다. 할 수 있다. 내겐 언제나 반겨 줄 레이의 집과 나의 엄마들이 있으니까.
두 가지 시점이 좋았다. 인생에 늘 오기 마련인 파도. 끊임없이 밀려올 파도를 넘어서며 그래도 잘 견뎌온 삶에서 이제는 파도타기를 하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파도를 '즐긴다'라고 말을 할 수 있다. 이런저런 상황이 밀려왔어도 이를 잘 극복하고 넘긴 엄마들의 삶과 이제는 파도처럼 부딪혀 나가면서도 당당하게 살아가겠다는 딸의 모습이 좋았다. 이제는 외부로부터의 담금질당하는 것에서 넘어서 스스로 적극적으로 나아가겠다는 것. 결국은 이것이 함께 가는 것 아닌가. 단단하게 세워진 바탕이 있으니 이제는 딛고 나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재미있었던 한 가지 부분이 있다. '나는 엄마와 모국어가 다르다는 사실이 크게 불편하지 않다. 같은 언어를 쓴다고 해도 어차피 부모와 자식은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혼자 쿡쿡 거리며 웃다가 반 아이들에게 읽어주니 공감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한다. 서로 모국어가 달라도 그럼에도 내가 그리고 나의 어머니가, 그 어머니의 어머니가 단단히 세워 온 바탕은 결국 그 딸을, 딸의 딸들을 서서 나가게 하는 힘이 되겠지. 아직 나는 나를 파도처럼 던질 자신은 없다. 다만 나도 나중에 파도를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 어쩌면 이미 파도를 타는 방법을 상당 부분 터득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만큼 단단해진 것은 모두 삶의 파도 덕분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