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대는 한참 떠들썩했다. 1998년이었나 1999년이었나. 여러 가지 문제로 서울대와 통폐합이 화두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사실 서울교대만의 문제는 아니었고 전국 교대의 문제였다. 각 교대가 위치한 지역의 국립대와의 통폐합이 이슈가 되어 우리는 이 문제로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기에 바빴다. 그리고 나는 내심 이 제안에 찬성하는 편이었다.
처음부터 교대를 오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안에는 다른 여러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 부분은 다른 브런치 북에서 다룰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정도로만 언급한다. 어찌 되었건 교대에 왔고 반수를 할까 싶었던 것은 어찌하다 보니 흐지부지 지나갔다. 당시 우리 과에는 1학기 지나고 휴학을 한 동기가 셋이었다. ㅎㅇ이는 반수를 해서 S대 역사교육과에 합격해서 옮겨갔고 ㅈㅁ는 E여대에 합격했으나 그냥 학교를 계속 다니기로 해서 한 학번 아래 후배들과 수업을 같이 들었다. 나이가 많았던 언니 한 분은 임신과 출산을 사유로 오랜 휴학에 들어가서 30명 정원의 우리 학번은 27명이 되었다.
내가 재수를 고민했던 이유는 교대 커리큘럼 때문이었다. 나는 공부가 하고 싶었다. 인문학 공부가 너무 하고 싶었다. 정말로 제대로 된 철학적 사유를 제공하는 공부. 미학 수업을 들으면서 철학 동아리를 만들어 아무도 시키지 않는 철학책을 스스로 사서 스터디를 했다. 그것도 타과 친구들과 진행했는데 서로 돌아가며 발제를 하고 선생님까지 모셔가며 진지하게 공부했다. 연극의 이해 수업을 들으면서는 고대 희곡이 주는 매력에 빠져 들었다. 이렇게 가뭄에 콩 나듯 들어있는 교양 수업은 내 가슴을 뛰게 만들었고 나는 이런 공부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과 분위기도 한몫했다. 영어교육과 친구들은 대부분이 Y대, K대, E대에 복수합격한 아이들이었다. 그들이 명문이라 불리는 대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여기에 온 이유는 다양하지만 안정된 직장이라는 사실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교대 커리큘럼의 대부분은 각 과목의 교육학과 교육과정 분석, 재구성하는 것과 수업 지도안을 짜 보고 각종 실기를 익히는 것이 많았다. 2주간의 실습은 학점에 들어가지도 않는 그냥 필수 학점인지라 다른 대학교보다 2주 늦게 종강하고 더 빨리 개강을 했다. 학점 구성은 얼마나 치사한지 3시간을 들었는데 2학점, 2시간을 들으면 1학점을 쳐 주었다. 과학 교양 같은 경우는 물리와 화학, 생명과학 이렇게 각각의 교수님께 1시간씩 수업을 들어야 했고 리포트와 시험을 다아 따로 보아 시간과 노력은 세 배가 훨씬 넘게 들었지만 학점은 0.666666으로 더해져서 2학점에 불과했다. 가끔 지독한 수업은 3시간인데 1학점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서예는 숙제도 많아서 계속해서 붓을 잡고 몇 시간씩 과제를 해야 했으니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좀 더 학문의 기초를 닦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우리는 계절학기도 없었다. 다른 학교와의 학점 교환도 없었다. 그러던 찰나에 교대 통폐합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번뜩 든 생각은 '최소한 교양과정만큼은 서울대의 저 치밀한 수업들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덩달아 나도 S대 생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알량한 마음도 물론 함께 있었다. 서울대의 원하는 학부에 지원하기엔 모자랐고 하위 학부는 애매하게 간당간당해서 아쉬운 마음으로 B군의 교대를 선택했던 내게는 솔직히 매우 매력적인 방안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마음이 살짝 붕붕 떠 있던 내게 ㅅ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이대로가 좋은 것 같아. 집중해서 아이들을 위한 교육과정을 제대로 배울 수 있고 그래서 한 가지 목표를 향해서 깊이 있게, 소수 정예로 제대로 고민하고 배워서 현장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 정말 좋은 초등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큰 학교가 아니라 이렇게 집중적이고 전문적인 과정이 맞는 것 같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정말로 한 대를 맞은 것 같았다. 내 마음에는 내가 하고 싶은 공부만 가득했고 내 욕심만 가득했지 정작 졸업하고 현장에 나왔을 때 마주해야 할 아이들에 대한 고민과 교사상에 대한 자세는 뒤로 밀려 있었던 것이다. 원래도 차분차분하고 말을 상냥하게 했던 그녀의 곧은 신념과 확고한 가치관을 제대로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원래 예뻤던 그녀가 더 반짝반짝 아름답게 빛이 난다고 여겨졌다. 그녀의 그 말을 들은 다음부터 좀 더 교사상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결국 교대 통폐합은 최소한 서울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십 년이 넘게 지났다. 젊은 시절 들었던 수많은 감동적인 말이나 사건들은 많이 잊히고 희미해졌다. 하지만 ㅅㅈ의 저 말만큼은 두고두고 생각이 난다. 그래서 가끔씩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고 하는 일들이 많을 때에도 나는 생각한다. 나는 초등교사라는 사실을. 내 본분과 지금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그녀의 말을 떠올리면서 생각한다. ㅅㅈ는 어쩌면 나와 저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도 잘 기억 못 할지도 모른다. 나도 가끔 후배나 친구들이 "내게 네가 이런 말을 했고 나는 그 말을 마음에 담았어."라고 할 때 '그랬나?' 싶으니까.
온라인상에서 가끔씩 보지만 오랜만에 오프라인 상에서 마주한 것은 거의 1년 만이다. "여울아, 너는 눈 괜찮니? 나는 노안이 왔어!"라고 살며시 웃으며 핸드폰을 들고 이리저리 글씨를 읽으려는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예뻤다. 서로 전화를 붙잡고 수시로 이야기하고 안부를 묻는 그런 사이는 아니지만, 오랜 시간 서로를 알아오고 함께 길을 걸어온 동갑내기 우리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그 공감은 오늘도 내 마음을 따듯하게 해 준다.
아쉽게도 내가 복직하면서 살던 동네로 이사를 왔을 때 그녀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그러니 우리는 또 엇갈린 셈이다. 진심으로 그녀가 우리 아이들의 담임 선생님이 되어주기를 바랐는데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참 아쉽다. 서울 동쪽에서 열심히 오늘도 1학년 아가들과 복닥이면서 참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그녀가 내 친구로 같이 학교라는 동일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나는 또 힘을 얻는다. 너는 너의 방식으로, 나는 나의 방식으로, 하지만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나누면서 (사실은 내가 더 많이 받으면서). 그렇게 또 남은 이십 년간의 교직생활을 함께 잘해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같이 가는 동기가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임을 또 한 번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