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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Aug 27. 2024

꿈이 뭐예요?

이금이, 소희의 방, 숨은 길찾기

아침 출근하는 길이었다. 주로 듣는 모닝스페셜에서 이런 질문이 나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답을 보냈다. 어릴 때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었다, 아프리카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 지금도 준비 중이다...이런 대답들 사이에서 '어릴 때 되고 싶었던 교사가 되었으니 꿈을 이루었어요'라는 대답이 있었다. 나도 교사가 되었다. 그럼 나는 꿈을 이룬 것일까?


답변을 써서 보내기엔 이제 교실에 올라가야 하는 시간이 임박하여 나는 시동을 끄고 서둘러 나왔다. 이 질문이 마음에 걸려서 계속 내내 맴돌았다. 나는 꿈을 이루었나? 꿈을 꾸고 있나?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일까?


나는 유학을 가고 싶었다. 새로운 곳에서 조금은 서먹하고 주눅이 들겠지만 그래도 하나씩 이겨나가면서 도전을 하고 만들어 가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것을 좀 많이 늦게 알았다. 교대를 간 것은 잘한 선택이었지만 그래서 잘못된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나와 마찬가지로 진로가 정해져 있는 전공을 선택한 절친의 고민도 같았다. 우리는 대학을 졸업한 후 진로가 너무 뚜렷해서 내가 정말 뭘 좋아하고 잘하는지 고민을 하고 탐색을 할 수가 없었다. 배부른 호사라고 여겨질 지도 모르겠지만 그랬다.


오늘 [너도 하늘말나리야]의 저자 이금이 작가의 그 다음 이야기 [소희외 방]을 읽었다. 외로움이 있던 달밭마을의 세 아이 중 소희의 이야기. 오랜 시간 엄마와 떨어져 있던 소희가 엄마가 재혼한 새로운 가족과 지내면서 자신의 삶을 찾아간다. 부잣집으로 가서 모든 좋은 것이 소희의 것이 되었지만 친한 친구들에게 자신의 원래 삶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의도치 않게 사실을 말하지 못한 것들이 거짓이 되어 쌓여간다. 



고모네 집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던 날, 능소화 덩굴이 줄기만 남아 벽에 달라붙어 있는 걸 보았다. 담장을 뒤덮었던 여름날의 푸르고 붉었던 찬란함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산다는 일의 진정한 의미는 여름날의 무성함과 찬란함이 아니라 겨울날의 초라함과 힘겨움에 담겨 있는 건지도 모른다.

달밭마을의 느티나무처럼 밧줄에 가지를 의지한 채 눈바람을 맞는 일이, 그것을 견디는 일이 인생일 것이다. 내가 행복을 느끼는 순간에도 삶은 그럴 테지. 그걸 알기에 나는 앞으로 이 일기장에 담기는 행복하고 즐거운 일은 물론 힘들고 괴롭고 아픈 일까지도 모두 다 사랑할 것이다. 그럴 것이다.




소희는 고민 끝에 친구들에게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털어놓고 친구들은 이를 받아준다. 책에서는 그랬지만 현실에서는 또 달라질 수 있다. 아마 친구들이 등을 돌리고 떠나는 이야기라면 책의 분량이 두 배 이상은 되어야 이야기들이 받아들여질 것이다. [소희의 방]에 이어서 [숨은 길 찾기]로 이어지는 미르와 바우의 뒷 이야기까지 읽었다. 1999년에 출간된 [너도 하늘말나리야]를 읽으면서 어찌나 좋던지 매년 졸업하는 반 아이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 시리즈가 2014년 완간이 되었다는 것을 늦게 알았는데 그러고 나서도 10년이 지났으니 나는 이 책을 20년 넘게 마음에 품고 있었던 셈이다. 


하나의 갈등을 겪어내고 잘 극복했다고 해서 그 후의 이야기가 계속된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것은 이제 알 만큼 나이가 들었다. 어쩌면 [한 아이]를 읽고 나서 쉴라가 잘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지만 토리 선생님에게도 쉴라에게도 펼쳐지는 그 이후의 삶은 결말이 암시하는 것 같았던 fancy 팬시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와 닿았다. 소희의 격렬한 살아냄이, 바우의 잔잔하지만 거센 고뇌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허세와 자존심으로 이리저리 부딪혀 보는 미르의 풍랑이 단순히 청소년 아이들의 그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책 속에서도 보여준다. 어른들도 실패를 하고 실수를 한다고. 나이가 들어서 다 완벽할 것 같지만 아니라고.




내 세대의 여성들은 얌전하고 순종적이고, 욕망을 드러내선 안 된다고 교육받으며 자랐다. 

아이들은 결코 일찍 철들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더 확고해지고 있다. 아이들은 제 나이다운 모습으로 살 권리가 있고, 어른과 사회는 아이들이 그렇게 자랄 수 있게 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소희는 어쩔 수 없이 조숙한 아이로 성장했다. 하지만 자기만의 방에서 조금씩 조금씩 본성을 되찾아 간다. 독자들도 소희처럼 스스로를 사랑하며 자기다운 모습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사춘기 때 거세게 방황을 해 봐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때 겪어 봐야 다음에 비슷한 상황을 만났을 때 조금 더 침착하게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어서야 알았다. 나름 평탄하게 보냈으니 안심이라고 해야 할 것은 전혀 안심이 아니었다. 아직도 슬프고 어려운 것은 내가 그렇게 사춘기 때 겪지 못했던 요동치는 상황에서 부모님께 털어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부모님이지만 서로 부딪히고 깨져가는 과정을 겪더라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여전히 나는 혼자서 외롭고 혼자서 괴롭다. 아이러니한 것은 오히려 딸들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시선이 달라도 서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 그래서 감사하다는 것을 나는 어른이 되어서, 부모가 되어서 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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