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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Aug 29. 2024

영어 원서 한 권 끝까지 읽어 보셨나요

몇 년 전 눈에 확 들어오는 제목이 있었다. '영어책 한 권 끝까지 읽어 봤니?' 속으로 생각했다. '우와, 되게 멋지다. 영어원서를 한 권 끝까지 읽어보자는 내용인가 봐." 아니었다. 아, 물론 맞기는 했다. 제목은 '읽어 봤니'가 아닌 '외워 봤니' 였었다. 나중에 책을 읽어 보고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내용이라 약간의 실망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책은 좋았다.


그리고 많은 다른 영어공부법 관련 책들을 좀 보았는데, 대부분 열심히 끝까지 외운 사람들의 성공담이었다. 일본의 영포자였던 한 분은 영어와 24시간 밀착으로 1년을 지내면서 하버드대까지 합격한 이야기와 비법을 담아내셨다. 물론 직장에 다니니까 일은 하지만 그 외 출퇴근 전과 자투리 모든 시간들이 다 영어공부로 꽉 채워져 있었다. 아직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솔직히 나는 그렇게 못하겠다. 그래서 영어라는 우물을 피아노와 함께 가장 오래 길게 파면서도 아직까지 영어 최상급 레벨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영어를 천천히 자주 조금씩 그렇지만 길게 공부를 할 수 있었던 비결은 한 번에 질리게 하지 않아서이다. 영어를 너무 많이 하고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어지러움이 느껴진다. 할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으니까 그만큼만 하는데 대신할 수 있을 때 조금 더 늘려가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란 완전히 자율적이지는 않으니까 가끔은 반강제적인 틀을 만들어 주어야 할 때가 있다. 혼자서는 틀을 깨기가 상당히 쉬우니까 그럴 때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모임을 만드는 것이다. 


영어원서 한 권 읽기, 줄여서 영원한 읽기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은 또 역시 코로나 때문이었다. 그 해 3월, 난생처음 맡는 3학년 담임 준비를 하던 나는 갑자기 텅 빈 시간의 공백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난감했다. 전부터 영어 필사를 생각해 보긴 했다. 남이 정해주는 필사 말고, 내가 읽으면서 좋은 부분을 필사하고 싶었다. 책은 내 인생최애책 빨간 머리 앤, Anne of Green Gables. 블로그를 통해서 여섯 분 정도 모였다. 그리고 빨간 머리 앤은 지독하게 어려웠다. 아마 코로나로 인한 강제 격리 기간이 아니었고 첫 도전 책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읽을 수 있었을지는 정말 미지수다. 


앤 시리즈 열 권을 정말로 사랑했던 나는 한글판으로 몇 번이 아닌 몇 십 번을 읽었다. 그럼에도 영어 원서로 만나는 앤은 난감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백 년도 전에 쓰인 책이기 때문이다. 1908년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쓴 이 책은 우리나라의 개화기 소설인 무정이나 상록수보다도 더 오래전에 쓰인 책인 것이다. 아무리 한글로 쓰인 책이라도 백여 년 전의 책은 문법은 물론이거니와 단어와 관용어구의 쓰임새가 다를 수밖에 없다. 대표적으로 Marilla ejaculated.라는 문장에서 ejaculate라는 단어를 찾아보니 사정하다라고 나와 있길래 애원하다는 뜻의 사정인 줄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라 분출하다의 사정이었다....... 무엇을 분출하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리고 몽고메리는 식물을 매우 사랑해서 정말로 엄청나게 많은 꽃과 식물과 나무의 이름들이 사방으로 펼쳐지는데, 우리말로 읽으면야 다양한 식물의 군락이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지겠지만 영어로 읽으면 이게 뭔지 대략 난감하기만 할 뿐이다. 


매일매일 읽으면서 쓰면서 생각하면서 나누면서 그렇게 앤 1권을 읽고 나서는 조금 쉬운 책들을 읽었다. 아름다운 아이 Wonder, 기억전달자 The Giver, 구덩이 Holes... 그렇게 읽다가 앤 시리즈 중 한 권을 또 읽었다. H마트에서 울다 Crying in H Mart 같은 책은 생각보다 너무 어려웠고, 다들 쉬워서 추천한다는 곰브리치 세계사는 말도 못 하게 어려워서 포기자가 속출했었다. 나는 리더라서 정말 필사적으로 읽어내었는데 이 책이 왜 어려운가 생각해 보니 우리가 아는 역사 용어와 이름이 영어식 명칭과는 달랐던 것이다. 그렇게 책들을 읽고 읽은 지 벌써 4년이 넘었고 이제는 23번째 원서로 파친코 Pachinko를 읽고 있다. 많이 두꺼운 책이라 3주씩 3번, 9주로 길게 잡아서 읽고 있다. 물론 다 같이 읽는 프로젝트로 센 책만 공식적으로 23권이고 개인적으로 따로 읽은 책들도 많았다. 한 번 완독의 즐거움과 감동을 맛보게 되면 지속시키고 싶기 마련이다.


한글책으로 읽는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이 영어 원서에는 담겨 있다. 우선, 느리게 읽을 수밖에 없다. 내가 아무리 속도를 내어서 읽는다고 해도 눈으로 쓱 훑으면 되는 한글책과는 다르게 속도가 참 나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그만큼 꼭꼭 씹어서 생각을 하게 된다. 저절로 슬로우 리딩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리고 한글번역본에서는 도저히 전달이 되지 않는 그 언어 특유의 문화와 단어 및 표현에 담겨 있는 감각들이 들어오는 순간들이 있다. 각각의 언어는 그 나라와 문화의 혼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언어의 결이 아니면 도저히 전달이 안 되는 것들이 있다. 날 것 그대로 생생하게 전달되는 감동은 번역본을 통한 것과는 또 다르게 오는 것이다.


이렇게 슬로우 리딩으로 읽다 보니 퍼즐 조각이 맞춰지듯이 흐름의 조각들이 맞물리는 것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로이스 로리의 별을 헤아리며, 곰브리치 세계사,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등등의 책들 속에서 계속해서 등장하는 세계 2차 대전은 심지어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앤 시리즈의 마지막 권과도 맞물려 있다. 앤은 아이를 여러 명 낳는데 그중 셋째 월터는 세계 1차 대전에서 사망하고 막내딸 리라는 캐나다에 남아서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서는 여인들의 삶을 보여준다. 이후로 몽고메리는 더 이상 앤 시리즈의 책을 쓰지 않았는데 이제 겨우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려는 앤과 리라에게 또 다른 전쟁이 어떻게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는지 풀어내기 어렵지 않았을까 싶다. 1942년에 생을 마쳤으니 공식적으로 종전이 되기 이전이다.


아무래도 영미문학의 특성상 오래전 책들을 읽기는 어렵고 백 년 이내의 책들을 주로 읽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면서 서양사와 서양 문화권이 어떻게 형성이 되고 이 현대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지금 우리 시대는 어떻게 나아가는지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책들 속에는 우리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수시로 고전에 대한 이용구와 이야기가 등장한다. 앤 시리즈나 가재가 노래하는 곳과 같은 책 속에서는 아더왕에 대한 싯구나 Red Wheel Barrow와 같은 명시가 실려 있어서 또 그들의 문화가 어디를 지향하는지 확장이 되어 간다. 고전 읽기와는 다르게 그래서 영어원서 읽기는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를, 그리고 나를 조금 더 가까운 역사적 관점에서 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럼에도 원서를 읽으면서 현재의 문화가 좀 더 이전의 과거와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자잘한 조각들을 맛보게 되고 조금 더 큰 세계관을 그려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이제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다양한 인종의 작가들이 영어로 된 좋은 책들을 출간해 주고 있다. H 마트에서 울다를 읽으면 한국이민 2세들의 고뇌하는 삶을, 그리고 파친코나 사금파리 한 조각과 같은 책을 통해서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우리의 문화들이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지를, 레슨인케미스트리와 같은 책은 미국에서도 여성인권이 탄압받던 시절이 있었음을,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나 Educated와 같은 책을 통해서는 소외된 계층의 슬프면서도 필사적인 생존의 이야기를, 리 바두고의 섀도우 앤 본 트릴로지 시리즈를 읽다 보면 동유럽 특유의 정서가 판타지 세계에 어떻게 반영이 되었는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영어 원서를 한 권 끝까지 읽기는 결코 쉽지 않지만, 우리가 늘상 친근하게 사용하는 언어가 아닌, 다른 나라의 언어를 통하여 그들의 문화를 느껴 보는 것은 해 볼만한 경험이고 가치로운 일이다. 영어 원서를 읽다 보면 우리말로 된 책에도 또 갈증을 느끼게 된다. 결국 책 읽기는 책 읽기를 부르는 선순환을 통하여 내가 가진 모국어의 확장과 아울러 좀 더 넓은 세계를 볼 수 있도록 시야를 넓혀 준다. 오늘도 나는 책을 읽을 수 있어서, 그리고 함께 책을 읽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그리고 좋은 책을 내어 주시는 분들이 계심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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