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길만 걷기를 바라는 것이 과연 좋을까
그리고 아이들을 보는 내 마음
나는 사춘기를 비교적 양호하게 보냈다. 사실은 마음에 요동이 격하게 쳤지만 내색하지 않았고, 내색하기도 힘들었다. 기독교 가정에서 엄하게 양육을 받았고 아파도 교회 가서 아프고 피곤해도 교회 가서 졸아야 한다고 배웠다. 아프면 내 삶에서 생활에서 잘못한 것이 있는지 돌아보고 회개하라는 가르침도 함께 왔다. 지금은 많이 유해지셨지만 왜 그렇게 가르치셨는지는 이해가 되긴 한다. 혹여라도 자녀가 잘못될까 우려가 되어 가장 옳은 기준으로 가르치시려고 하셨을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부모님은 나와 동생이 항상 안전한 울타리 안에 있기를 바라셨다. 두 분 모두 그러셨는데 특히 엄마는 외모에 대해서 신경을 쓰고 꾸미는 것을 정말 좋아하지 않으셨다. 내 친구 엄마들은, 동생 친구 엄마들은 데리고 나가서 옷과 화장품과 가방을 사 주면서 꾸미고 다니라고 한다는데, 우리 엄마는 화장하면 "안 해도 예쁜데 왜 하니?"라고 하셨고, 염색과 펌은 물론이고 액세서리 착용도 싫어하셨고 특히나 귀걸이는 창녀들이 뚫는 거라고 경박해 보인다고 절대절대 못하게 하셨다. 우리가 하도 원하니까 "결혼해서 하던지"라고 하셨다. 결혼하면 집을 떠나니까 그때는 너네 맘대로 하라는 뜻이다. 나는 중간에 어떻게 아빠를 설득해서 귀를 뚫긴 했다. 가장 친한 친구가 귀걸이를 생일 선물로 줬는데 아빠도 아시고 예뻐하셨던 친구라서 "ㅈㅇ이가 줬다고? 그럼 뚫어라." 하시면서 허락을 해 주셨지만 엄마의 정말 결사반대로 동생은 결혼하고 나서야 뚫었다.
그렇게 교회 안과 집 안에서 가능하면 세상의 문화에 노출을 적게 시키고 안전하고 좋은 것만 보여주고 먹여주시려고 노력하셨다. 그래서 아마도 사춘기 때 놀러 다니지도 않고 공부만 하면서 지냈고 유일한 일탈은 만화책과 만화잡지를 보는 정도였다. 친구가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해도 물어보는 것조차 차마 무서워서 "나는 안 갈래."라고 대답했다. 친구들은 놀이공원도 자기들끼리 가는데 나는 끽해야 생일 파티로 노래방 가는 정도로 그쳤다.
그렇게 평편하고 평탄한 학창 시절을 보내고 나서 대학생이 된 다음에는 몰랐던 문화 충격에 몇 년간 힘들었지만 그래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엄마 몰래몰래 연애도 좀 했지만 결국 다 헤어졌는데 대부분은 교회 문제와 종교 문제였다. 종교 문제가 아니었으면 나는 대학 졸업하자마자 첫사랑 선배와 결혼했을지도 ㅋㅋㅋ (그만큼 둘이 좋아했는데 종교는 극복이 안 되었다.) 연애조차도 때가 되면 너를 기다리는 사람과 할 테니 하지 말라고 했고 누군가와 만나고 있다고 하면 만날 때마다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다 이야기를 해야 하니 그 스트레스로 결국 헤어진 경우도 좀 있었다.
당시에는 나름의 사춘기와 과정을 다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지나 보니 아니더라. 사실은 내 안에 생각들이 있었는데 부모님의 권위와 종교의 권위로 그저 누르고 있었을 뿐이고 사회 질서에 순응하면서 사는 것이 맞다고 배웠기 때문에 거기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큰일이 나는 줄 알았다. 교대생들은 그런 경향이 좀 더 강한데 그중에서도 나는 조금 더 그랬던 것 같다.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면서 불태웠지만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가슴이 원하는 일을 따르지 않고 부모님의 의사에 따랐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다. 또 나의 그런 행동으로 인해 부모님이 받게 될 시선이 두려웠다.
뭔가 이상하다고 여겨졌던 것은 서른 중반 정도부터였다. 힘들어도 나만 참으면 되는 거라고 여겨서 그렇게 살아가는데 뭔가 조금씩 틀어짐이 보이고 (사실은 전부터 있었는데 그냥 꾹꾹 눌렀던) 그리고 그 틀어짐을 바로 잡으려 해도 오히려 잘 되지 않고 더 균열이 커지는 것이 보였다. 마흔이 될 무렵... 이렇게 살다가는 내가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내어 보내야 할 때 흘려보내지 않고 그냥 누르고 눌러서 쌓인 깊은 골이 보였다. 십 대 사춘기에서 나를 재정립하지 못하고 이십 대 삼심 대를 보내면서도 나를 둘러싼 틀에 맞추어 보냈다. 부모님이 보시기에 안쓰럽기도 했겠지만 그것이 그래도 가장 좋은 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셨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나중에 있을 상급을 바라고 현생을 견디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삶에서 무조건 참고 감수해야 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딸이 꽃길만 걷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부모님이 생각하시기에 가장 좋은 길로 가도록 하셨지만 결국 내게는 가시밭길이 되어 버린. 그렇다고 그분들을 원망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알았을 뿐이다. 내게 가장 좋은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가장 좋은 것이진 않을 수 있다고. 그리고 어떤 길이든 아이가 가고 싶어 한다면 열어주는 것이 맞다고.
그리고 부모의 역할은 아이가 아파할 때 같이 아파해 주고 곁에서 아이의 어떤 모습이라도 품어주는 것이지 부모의 기준에 맞추어 아이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아직도 고민 중이다. 이제 나 혼자만의 일탈 내지는 변화를 꿈꾸기에는 나를 둘러싼 것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도 네 아이들을 생각하면 힘들어도 지금의 삶을 10년간 더 유지해야 하겠지. 막둥이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 그때까지만. 그럼 이제 결혼할 때까지... 이런 식으로 미루다가 계속 미뤄진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어릴 때는 부모님, 커서는 아이들과 가족. 나를 향한 손가락질과 시선보다도 가족들이 받게 될 배타적인 시선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서 못하겠다. 역시. 십 년을 기다리긴 해야겠다. 다만 엄마가 주고 싶어 하셨던 그 꽃길을 나는 우리 아이에게 주진 않겠다. 아이가 가시밭길을 걸어갈 때 같이 가 주겠다. 잘 헤쳐 나갈 수 있도록. 곁에 너를 지지하는 엄마가 항상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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