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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무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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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텔 Sep 18. 2020

시카고 피자 한 조각

속을 따땃이 채워준 한 끼

고등학교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으라면 이때가 떠오른다.

추운 한 겨울날, 시카고 다운타운으로 필드 트립을 갔던 때. (필자는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나왔다.)

정확히는 골목 어느 노숙인과 피자를 나눠 먹은 때.


시카고는 초록 강물이 아름답고 바람이 거세기로 유명하다. (별칭이 'Windy City'다.)

동시에 슬럼가와 거리 곳곳에 자릴 잡은 노숙인들로도 명성이 자자하다.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로 꼽힌다.)


몇 번이고 왔던 곳이지만 올 때마다 새삼 웅장하고 미래적인 모습에 압도되는 곳.

이날도 어김없이 높디높은 빌딩을 향해 고갤 쳐들고는 좀처럼 입 다물지 못하던 나였다.

그때 영어 문학 과목을 담당하시던 Boyer 선생님께서는 고개 숙여 다리 맡 노숙인들을 보고 계셨나 보다.


"배고프세요? 피자 한 조각 드실래요?"

놀래서 눈을 돌리니 선생님께서 한 노숙인에게 말을 건네고 계셨다.

측은해 하지도, 조심스럽지도 않았다. 뭐랄까, 어떤 낯선 이를 붙잡고 '밥 한번 먹을래?' 묻는 천진난만하고 당돌한 목소리였다.

옆에 계시던 내 치어리딩 코치이자 역사, 신학을 가르치시던 Filter 선생님께서도 합세했다.

"같이 가서 먹어요!"


솔직히 당황했다. 그 노숙인도 조금은 그런 눈치였다.

연신 고맙다는 말을 뱉는 그를 이끌고 근처 피자집으로 향했다.

얼떨결에 나도 동행하게 됐다.


피자를 시키고는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 받던 우리.

그 대화 속에는 그의 거리 생활과 주머니 사정에 대한 물음은 없었다.

약간은 어색하지만, 결코 싫지 않았던 대화들, 웃음들.


나는 그 순간 내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무슨 말로 대화를 채웠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혹독한 추위를 비집고 들어온 탓에 유독 따땃이 느껴지는 공기와 발그스름한 조명만이 어렴풋이 그려질 뿐.


그때는 몰랐다. 이 장면이 앞으로 인생에 두고두고 떠오를 줄은.


흔히 아는 동화 '우동 한 그릇'과도 같은 내 '피자 한 조각'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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