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대화] <Let's go to my star> 작연출가 최아련
이 글은 12월 26일 합정역 카페 <새검정>에서 이뤄진 대화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대화가 2시간 넘게 쉴 새 없이 이어진 터라 글 한 편에 대화를 담아내기가 어려워 이것도 시리즈로 내보렵니다. 전 이 대화가 참 재밌었거든요. 대화의 핑퐁이 느껴지고 재미가 닿길 바라며 써봅니다.
[1편] 우리가 지구에 떨어진 외계인이라면 https://brunch.co.kr/@esther23/10
시즌 1에서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직관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단계였다. 그러나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그리 간단하게 해결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특정 문제를 꼬집기 시작한다. <렛츠고> 시즌2에서 집요하게 파고든 문제는 <자본주의>였다.
롸두섭은 자본주의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 사회주의에 관한 기본개념부터 시작해 자본주의의 역사, 탈성장 등을 공부했다. 우리는 계속 성장할 수 있다는 무한성장 논리를 맹신하면서 계속해서 경제 발전만을 추구한다. 하지만 사실 지구의 자원은 한정적이고 현재 환경문제도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서 이상적인 상태가 아니며, 맹목적인 경제성장만을 추구하는 것은 모두가 자멸하는 길이라는 것을 메타버스 세계와 엮어 이야기를 했다. 메타버스라는 가상세계에서 인간의 기술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 인간의 오만함을 보여준다. 유토피아인 줄 알고 가상세계에서 들어갔지만 디스토피아가 되어 버리는 모습이 시즌 2에 그려진다.
시즌2부터 관람했기 때문에 비록 2023년에 봤지만 기억에 남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하우스 음악이었다. 시즌2는 마돈나의 material girl이었다. 연속된 기계음에 물질만능주의를 말하는 가사가 인상 깊었다.
Madonna(마돈나) - Material Girl 가사 중
Living in a material world
물질만능주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And I am a material girl
나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소녀거든
디바를 좋아하는 아련답게 시즌 모두 하우스 음악은 마돈나의 노래로 진행했고 시즌1 open your heart, 시즌2 material girl, 시즌3 future lovers로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하우스 음악으로 말하고 있었다. 시즌2를 자본주의의 왜곡된 모습을 밝히며 끝이 났는데, 그에 해답으로 내놓은 시즌3의 주제는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시즌1에 외면받는 가치, 시즌2에 자본주의, 그런데 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 돌봄이라고?
사실 처음에 공연을 보기 전엔 이들이 내놓은 대안에 설득되지 않았다. 자본주의를 얘기했다면 뭐 간단히 생각했을 때는 공유경제 등등 대안 되는 무언가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왜 돌봄이었냐고 물었다.
롸두섭은 같은 맥락으로 리서치를 했는데 시즌3까지 갔다면 관객에게 답은 아니지만 이들이 생각하는 대안사회가 무엇인지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리서치 끝에 이들이 찾은 답은 돌봄이었다. 돌봄은 자본주의, 성장주의에서 말하는 각자도생과 경쟁, 승자독식과 대항하는 가치이다.
이들은 말하는 돌봄은 자본에서 벗어난 돌봄을 말한다. 정치적인 목적에서 나온 국가에서 말하는 제도적 돌봄이 아니라 고령화 사회에서 돈을 벌기 위해 기업에서 말하는 돌봄이 아니라 이들이 말하는 돌봄은 이러한 맥락에서 벗어난 진짜 사람대 사람이 관계를 맺으면서 보상을 바라지 않고 서로를 돌보는 것이다.
그래서 시즌3에서 제시하는 대안사회 케어로토피아에선 돌봄 노동을 하고 돈을 주고받지 않는 것이다. 사실 돈으로 돌봄에 대한 가치를 환산할 수 없음을 더 강하게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효율에 미쳐 서로를 바라볼 여유조차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더불어 살아왔고 사회화 됐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인간의 태초적 본능을 역행하면서 스스로를 갉아먹고 멸종의 길로 제 발로 걸어가는 것이 옳은가?
하지만 시즌3 중 케어로토피아 장면을 보다 보면 어쩐지 시비를 걸고 싶고 씁쓸했다. 일하지 않고 서로 돌보기만 하면 국가에 세금은 누가 내나? 여유 있는 것 좋지만 부족함 없고 필요한 만큼만 만드는 것 좋지만 그게 현실적으로 되나? 속으로 한껏 시비를 걸다 이윽고 아주 슬퍼졌다. 저곳이 지나치게 아름다우면 내가 있는 이곳이 너무 우울하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하지만 이건 가상이니까. 연극이니까 하고 시름에서 몸을 털고 나왔다.
연극은 세상을 돌보는 일이잖아
- <Let's go to my star> 시즌 3 대사 중
<Let's Go To My Star>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21세기형 포스트 서사극으로 발전시키고자 전통적인 서사 구조에서 벗어난 스토리텔링, 대중문화, 노래와 춤, 영상, 인터넷 밈과 같은 재료를 탐구해 고유한 표현형식을 실험합니다.
작품소개서에 적혀있는 이 글을 읽은 뒤 질문이 3가지 정도 나오지 않을까 싶다.
Q1. 베르톨트 브레히트?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는 독일의 극작가이자 연출가, 시인으로서 20세기 연극과 문학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대표작으로는 『서푼짜리 오페라』, 『갈릴레이의 생애』, 『사천의 선인』, 『코카서스의 백묵원』 등이 있으며, 그는 관객이 감정적으로 몰입하는 것을 지양하고, 사회적 문제를 이성적으로 성찰하도록 유도하는 '소외효과'를 통해 연극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Q2. 서사극?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관객이 극 중 사건에 몰입하지 않고 비판적 시각으로 사회적 문제를 성찰하도록 유도하는 연극 방식이다. 이를 위해 그는 사건과 캐릭터를 낯설게 보이게 하는 소외효과를 활용하여 관객이 감정적 동일시를 피하고 이성적 거리를 유지하도록 하였다. 극은 독립된 장면들로 구성되어 각 장면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강조하며, 무대는 최소한의 장치로 사실성을 배제하였다. 또한 노래와 해설을 삽입하여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고, 사회적·정치적 문제를 중심으로 다루며 변화를 촉구하였다.
Q3. 포스트 서사극???
????????????????????????????????????
독일의 연출가 브레히트는 관객이 이야기에 매몰되지 않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판단하는 주체가 되길 바라며 서사극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만들었다. 서사극에선 배우가 관객에게 말을 걸거나 욕을 하거나 해서 몰입을 의도적으로 방해한다. 그렇다면 포스트 서사극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보통의 연극은 드라마다. 이야기 기승전결이 있고 배우가 배역을 연기한다. 관객은 그 감정에 동요하고 몰입한다. 포스트 드라마는 드라마에 집중된 연극의 기승전결 방식에서 벗어나서 아주 해체적인 방식으로 연극을 만드는 것이다. 사운드, 이미지 등으로 연극의 요소를 해체하고 그것에 집중해서 극을 풀어내는 것이다. 전통적 방식에서 벗어난 전위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해체적이고 표현에 집중한 극을 선보이면 관객이 극의 의미를 찾고 해석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관객에게 떠먹여 주는 드라마 형식의 연극에 싫증이 나서 나온 것이 포스트 드라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서 포스트-포스트-드라마도 나왔다. 너무 해체적인 방식 탓에 관객이 부여한 모든 것이 의미가 되어 버리니 연극이 기존에 갖고 있던 사회적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적절한 드라마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타협점을 모색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연극의 본래 역할이 아니냐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 포스트-포스트-드라마다. 포스트 서사극은 포스트-포스트-드라마의 한 갈래이다. 아직 완전히 정립된 형태는 아니다.
아련은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20세기의 것이니 21세기 버전으로 만들어 새로운 형식을 실험하고 탐구하고자 <렛츠고>의 형식을 포스트 서사극으로 정했다.
나는 이들이 형식적 실험과 이야기 전달의 중심을 잘 잡았다고 생각한다. 창작자라면 전하고 싶은 이야기에 대한 욕망도 물론 있지만, 그보다 새로운 것을 실험하고픈 호기심이 아주 크다. 그런데 이 호기심이 너무 커져서 이야기를 덮어버리면 관객에게는 매우 불친절한. 예술적 형식도 전하고픈 메시지도 없는 애매한 무언가가 만들어지기 쉽다. 나는 이러한 맥락에서 현대미술을 매우 싫어한다. 물론 미술에 ㅁ자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현대미술 작가 전시회를 가면 작품 제목에 "무제"를 너무 많이 봤다. 작가의 의도는 알겠다. '당신이 이 그림을 보고 경험한 모든 것이 답입니다.' 하는 것을. 하지만 어쩌다 한 번 무제를 만나면 사유하고 고민하겠지만, 작품의 80%가 무제인 것을 경험하고 나면 그냥 성의가 없다고 판단한다. 작가가 작품에 질문이 없고 그저 자기 에너지에 북받쳐서 표현하기 급급했구나 하고 생각한다. 따라서 창작자가 고민하는 것, 그것이 관객으로 하여금 느껴지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창작자의 끊임없는 고민은 결국 작품 안에 이유가 생기고 마지막에 관객에게 납득된다.
창작자 : A를 왜 무대 위에 두는가? → ~~~ 하기 때문이다.
관객 : ~~ 해서 A가 무대 위에 있구나! → 납득
[3편] 연극이 끝난 뒤 세상에 남은 것
https://brunch.co.kr/@esther23/13
[1편] 우리가 지구에 떨어진 외계인이라면
https://brunch.co.kr/@esther2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