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참을 수 없는 라면 냄새
1984년 1학년에 갓 입학하자마자
영은이는 난생처음으로 컵라면의 냄새를 맡게 되었다.
중년의 파마머리가 촌스러웠던 담임선생님은,
아침식사를 안 하고 출근을 한 날이면 어김없이,
사발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교탁 위에 얹어 놓았다.
아이들에게는 자습을 시켜놓고서.
뚜껑을 닫아 놓아도 라면 냄새는 솔솔 온 교실에 퍼져나갔다.
3분이 지나면 선생님은
나무젓가락으로 후루룩 쩝쩝 라면을 먹어대는 거다.
영은이는 밖에 돌아다니면서 간식을 먹지도 못했다.
부모님으로부터 밖에서 돌아다니면서 먹으면 흘리기도 하고,
배고픈 다른 사람에게 예의가 아니라고 배웠다.
또 거지가 아닌 이상 집 안에서 상 위에 올려놓고 먹으라고 배웠다.
담임선생님은 예의가 없었다.
영은이는 늘 아침을 먹고 갔지만,
그 냄새를 참기가 힘들었다.
2교시가 끝나면 1학년 선생님들은
반별로 돌아가며 모여서 밀크커피를 마시는 티타임을 했다.
그 냄새도 참 향기로웠다.
하지만 라면 냄새는 커피 냄새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차원이 다른 냄새였다.
살짝 매콤한 듯, 달콤한 듯, 짭짤한 듯 서서히 퍼진
라면 냄새는 영은이의 오감을 자극했다.
냄새를 맡았을 뿐인데,
영은이는 머릿속으로 상상을 했다.
저 야들야들해 보이는 면발은 입 속에서 어떤 느낌일까?
영은이가 먹어본 잔치국수의 맛일까.
호로록거리는 선생님의 라면 먹는 소리는
영은이의 귀를 자극했다.
영은이는 입맛을 다셨다.
영은이는 집에 가서 엄마에게 라면 사달라고 졸랐다.
며칠 후 저녁 영은이 엄마가 안성탕면을 사 와서 끓여주었다.
영은이가 학교에서 맡아본 라면 냄새와는 조금 다른 거다.
영은이는 선생님이 먹던 그 사발면을 너무나 먹고 싶었다.
'안성탕면이랑 사발면은 면발도 다르게 생겼뿠네.'
5월이 되어 저녁식사를 하던 중
텔레비전에서 짜장 범벅과 카레 범벅 광고가 마침 나왔다.
영은이는 먹어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진짜로 맛있겠대이."
"너무 먹고 싶은데, 안되긋나?"
"얼매나 맛있을꼬?"
영은이가 밥을 먹으면서도 군침을 흘리고 먹고 싶어 하자,
마음이 동한 영은이 아빠가 100원짜리 다섯 개를 주셨다.
짜장 범벅과 카레 범벅이 각각 250원이었다.
짜장면이 500원이니 비싼 가격이었다.
가게에 가서
"짜장 범벅하고 카레 범벅 주이소."
계산을 끝냈을 때, 영은이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큰 기대를 안고 엄마한테 물을 끓여달라고 하고,
짜장 범벅에 뜨거운 물을 붓고 기다리던 3분이 어찌나 길던지.
마침내 3분이 지나 한 젓가락 먹어보았을 때, 그 맛이 기가 막혔다.
면은 야들야들 얇아서 안 씹어도 훌훌 넘어갔다.
짜장 가루로 만든 소스는 짭짤하고 달콤하니 입에 착착 감겼다.
"그렇게 맛있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영은의 부모는 맛있게 먹는 영은이를 바라보았다.
참새가 새끼에게 모이를 물어다 주고 흐뭇하게 쳐다보는 것처럼 말이다.
이후 영은이는 세상의 모든 라면 맛이 궁금했다.
1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한 짜장면을 대신하여,
영은이는 그렇게도 많은 라면을 사 먹었다.
마침 아기공룡 둘리에서 라면 노래까지 나오니 살짝 세뇌를 당한 듯했다.
'라면은 구공탄에 끓여야 제맛,
후루루 짭짭 후루루 짭짭 맛 좋은 라면.
하루에 열 개라도 먹을 수 있어,
후루루 짭짭 후루루 짭짭 맛 좋은 라면~~~~'
영은이는 그 노래가 너무 재미있고 좋아서 자주 흥얼거렸다.
영은이는 그 노래만 들으면 라면이 먹고 싶었다.
흡사 파블로프의 무조건 반사에 걸려든 것과 마찬가지였다.
영은이는 사리곰탕면, 까만소라면, 안성탕면, 신라면, 사발면, 김치사발면 등
기분 따라 다양하게 맛보았다.
영은이 엄마가 있으면 끓여주는데,
곤로는 영은이가 사용하기가 어려워서 라면 먹기도 쉽지 않았다.
가끔은 언니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영은이는 가끔 상상을 하고 계획을 세워보기도 했다.
월요일엔 너구리 순한 맛, 화요일엔 사리곰탕면, 수요일엔 카레범벅 등 말이다.
그러고 있노라면 세상은 마냥 행복한 곳이었다.
영은이 셋째 언니는 어떨 땐,
라면 국물을 적게 하여 졸여서 꼭 볶음면이나 스파게티 같은 질감을 살리기도 했다.
라면은 영은이 아빠가 안 계실 때 먹는 것이 상책이었다.
약간의 음식 쓰레기도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가닥의 면발도 남겨선 안되었다.
짭짤한 국물조차 남기면 안 되었다.
그건 흡사 고문과 같았다.
겨울방학, 한 번은 연탄 화로에 라면을 끓여 먹으려다,
물은 끓지 않고 안달이 난 영은이는
계속 양은 냄비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확인을 해댔다.
영은이는 라면은 고사하고 연탄가스만 잔뜩 마시게 되었다.
날이 추우니 문은 꽉 닫아 놓았고,
연탄보일러 뚜껑이 열렸던지,
벽에 틈이 생긴 건지 머리가 어지럽고 몽롱해져서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일하다 볼일이 있어 집에 영은이 엄마가 들어와 보지 않았다면
영은이와 동생은 하늘나라로 갈 뻔했다.
가끔 뉴스에 연탄가스를 마시고
일산화탄소중독으로 목숨을 잃는 사건이 보도되곤 했는데,
영은이는 나중에야 자신이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영은이의 라면 사랑은 계속되었다.
MSG의 맛은 영은이가 맛본 어떤 음식에서도 느낄 수 없는 감칠맛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국물에 말아먹는 찬밥의 맛은 뭐라 형언할 길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