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갈팡질팡 여고 2학년
대학에만 들어가면 천국이 펼쳐질 것이다.
조금만 참자. 조금만 더. 이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고 2가 된 나는 좀 더 본격적으로
조금 곁길로 빠지기로 마음을 잡았다.
이유는 고 1 시절이 너무 힘들고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고 2가 되어서도 부반장이 되어
여러모로 선생님을 도와야 할 처지였다.
가끔은 출석부에 적어야 할 내용을
선생님께 묻지도 않은 채
마음대로 기입했다가 혼나기도 여러 번이었다.
담임 홍승재는 나름 열심히 하는 나를
혼낼 수는 없고 짜증이 올라왔다.
빨간 볼펜으로 수정해 놓은
출석부를 볼 때면 화가 치미는 것이었다.
"호영은이, 니 마음대로 이래 써 놓을 기가?"
"아, 아니예, 앞으로는 여쭤보고 적을 기라예."
"그래, 앞으로 좀 잘해라."
"네."
나는 한 달에 한 번 그날이 되면,
너무 힘들었다. 뭐라 설명할 길이 없다.
늘 책상에 있고 운동도 체육 시간 외에는 하지 않아서인지
찌뿌둥하여도 몸이 무거웠다.
참 신기한 게 왜 그날이 되면
피부에도 트러블이 생기는지,
중학교 때까지 깨끗했던 얼굴에
빨간 꽃이 핀 것 같았다.
삐쩍 말랐던 몸도 하체 통통으로 변해서
굴러갈 것만 같았다.
'으이씨, 귀찮아 죽겠다. 진짜. 빨리 안 했으면 좋겠다. 진짜.'
'와, 여자만 이래 힘들어야 하노?'
나는 여자인 자신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아름다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햇살은 눈부신 날,
잔기침이 멈추질 않았다.
감기도 아니고
열도 안 나는데 목이 간질거리면서
기침이 계속 나니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영은아, 힘들제?"
"어? 아니, 뭐 그렇지."
"이거 마시고 힘내라."
"어, 고맙대이."
수정이가 캔에 든 따뜻한 실론티를 건넸다.
희고 예쁜 미술 전공생 수정이가
저 엄청난 계단을 쉬는 시간에 내려가서 매점에서
나를 위해 음료수를 사 왔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았다.
며칠이 지나,
수정이가 연락처를 하나 주었다.
함께 미술학원 다니는 고3 오빠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얼굴도 모르는 오빠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설레는 그 시간 덕택에 또 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게다가 주일에 중고등부 예배에 갔는데,
나와 편지를 주고받던 명광이 오빠가 출석을 하였다.
실제로 보니 너무 좋았다.
말로 표현이 안되었다.
아기 곰돌이 푸를 닮은 통통하고 귀여운
명광이 오빠,
사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일단 오빠를 만났다는 게 중요했다.
명광이 오빠는 나에게 이렇게 편지에 썼다.
"영은아, 하늘에 달보다 니 동그란 얼굴이
더 밝고 예쁘다. 달을 보면 영은이 얼굴이 아른거리는구나."
나는 그 편지에 또 감동을 받았다.
나는 참 감동도 잘 받고
실망도 잘했다.
사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오빠는
교회 오빠, 재혁이었다.
재혁이는 고3인데, 찬양 시간에
기타를 메고 찬양을 인도했다.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크고, 공부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기타 연주도 잘했다.
평소 나는 재혁이 오빠를 흠모했었다.
그러나 재혁이 오빠는 너무 인기남이라
나는 지레 겁을 먹었다.
너무 멋진 오빠와 만나기엔 스스로가 좀 모자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재혁이 오빠가
한 번은 예배 마치고 저녁에
집에 데려다주는데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기껏 한 말이
"재혁이 오빠, 오빠 이상형이 어떻게 돼요?"
"어, 우리 어머니 같은 분."
"아? 그래요?"
그 뒤로 서먹한 공기를 느끼며 집으로 갔고
이후 재혁이 오빠와 둘만 만날 시간은 없었다.
명광이 오빠와 전화 통화도 하고
편지도 주고받다가 토요일에 만나기로 했다.
토요일은 학교에서 일찍 마치니까 알맞았다.
명광이 오빠와 함께 약속을 해서 버스를 타고
해운대 시립 도서관에 갔다.
내가 가자고 했다.
"명광이 오빠, 우리 도서관에 갈까요?"
"그래, 영은이가 가고 싶으면 가재이."
그때만 해도 명광이 오빠가 책 따위엔 관심도 없다는
것을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책을 좋아하니까
다른 사람들도 다들 그런 줄 았았던 것이다.
명광이 오빠는 괜히 내 말 듣고 도서관에 갔다가
좀이 쑤셔서 죽는 줄 았았다.
나는 공부도 하고 책도 읽었는데
명광이 오빠의 낯빛이 시간이 지날수록 어두워져 가니
슬슬 걱정도 되었다.
내 눈은 책을 향해 있지만
옆 자리 오빠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오빠, 우리 코코아 한 잔 할까예?"
"그래, 영은아, 나가자."
밖에서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동시에 송홧가루와 꽃가루도 뒤집어쓰면서
코코아 한 잔을 했다.
그날이 오빠와 마지막 만남이었다.
나는 아무리 귀여워도 책 안 읽는 사람에게는
매력을 느낄 수 없었다.
한편 명광이 오빠는 내가 전화해도
잘 받지도 않았다.
공중전화에서 십 원짜리 동전 두 개를 들고
오빠집 전화번호를 누를 때마다
받을지 안 받을지 노심초사했다.
이유도 모른 채 연락이 되지 않으니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니었다.
일주일 후 수정이가 말해 주었다.
"명광이 오빠, 선자랑 지난주 일요일에 만났는데,
이스트팩 가방을 사줬단다. 네가 선자보다 훨씬
나은데, 마 잊어 버려라."
"진짜가? 명광이 오빠 그래 안 봤더구먼.
마무리도 안 하고 갈아탔나?"
나는 전교에서 유명한 깡패 소녀에게
명광이 오빠를 빼앗긴 게
분하면서도 한편 속 시원하기도 했다.
여우의 신포도처럼.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가 190cm에 달하는 정수 오빠가
또 눈에 들어왔으니 참, 못 말리는 나였다.
나는 속은 보지 못한 채 겉모습에 휘둘렸다.
언니들만 있다 보니
나는 오빠에 대한 환상이 있었던 것이다.
그저 '오빠'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나는 새로운 계획을 짰다.
아무래도 오빠들 만나는 것보다 스스로
멋진 여성으로 만들어보자 싶었다.
그렇게 해서 세운 계획도 결국 외모지상주의에서
나온 결과였다.
' 키 165cm
몸무게 48kg
서울대학교 입학'
이렇게 크게 써서 책상에 붙여 놓았다.
안될 때 안되더라도 꿈은 크게 꾸는 것이 아니던가.
결국 그 꿈들은 헛헛하게도
다 흩어졌지만 키와 몸무게는 그래도 근처까진 가보긴 했다.
며칠 굶었다가 안 되겠다 싶어 밥을 먹으니
금세 제자리를 찾긴 했지만 말이다.
머리에 헤어핀을 꽂고 고개를 쳐들었더니 164.3cm 되었다.
올림 하면 165cm다 싶었다.
하긴 모의고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에 10명 중 1등을 했다.
진짜는 아니라도 나는 마치 서울대에
합격한 것처럼 좋아했다.
그 와중에 나보다 네 살이나 어린 중1 에녹이가
나에게 고백을 하였다.
사실 고백은 아니지만 행동이 그랬다.
주일 예배 후 수첩이나 사인펜을 주었는데,
"에녹아, 니 내 좋아하제?"
그 말을 듣더니
에녹이가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어쨌든 중고등부 예배를 통해
연애의 맛을 아주 잠깐 봤으니,
그것만으로도 교회에서의 경험이 값졌다.
진짜 알아야 할 것에는 다가서지도 못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