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꿈에 그린 멜로디언
때는 1984년.
영은이가 국민학교 5학년이 된 지 얼마 안 된 봄,
쉬는 시간이었다.
미경이가 풍금으로 '엘리제를 위하여'를 오르간으로 연주했다.
미경이는 들장미소녀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파마를 한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쌍꺼풀진 커다란 눈망울이 매력적인 친구였다.
영은이는 미경이가 정말 멋있었고, 또 그렇게 오르간을 잘 치는
미경이가 부러웠다. 미경이는 음악시간에 선생님 대신으로 반주도 곧잘 했다.
곡 제목을 알게 된 건 며칠 전이었다.
아침 조회 전,
교내방송으로 반마다 장기자랑을 했다.
윗동네 세탁소집에 사는 선애가 피아노를 멋들어지게 쳤고,
진행자가 제목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선애는 한쪽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
곱고 어여쁜 얼굴 눈 주변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선애는 당당했고, 친구들도 선애의 화상을 놀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영은이의 같은 반 여학생들 중 몇 명은 피아노교습학원에 다녔다.
영은이 생각에 그중에서 선미가 가장 피아노를 잘 치는 것 같았다.
선미는 걸스카우트대원이기도 했는데,
베이지색 원피스에 캡모자를 쓴 모습이 너무 멋있게 보였다.
주근깨 가득한 얼굴이지만, 야무지고 똑똑한 친구였다.
선미는 가끔 담임 선생님이 시키면 걸스카우트에서 부르는 노래를 연주했다.
실수도 없이 어마어마하게 잘 치는 모습에 영은이는 황홀한 눈으로 친구를 바라보았다.
선미는 또 손율동도 멋들어지게 잘했다. 어떨 때는 미경이가 피아노로 반주를 하고 선미가
율동을 하면 반 친구들이 따라 노래를 부르며 손동작을 따라 했다.
미경이는 아람단을 해서 데님조끼와 치마를 셋업으로 입고 빵모자를 썼는데,
영은이는 아람단이 뭐 하는 곳인지는 몰라도 그 옷은 꼭 입고 싶었다.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영은이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영은이 집의 형편에는 단복과 입회비 등 몇 만 원도 큰 부담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피아노학원에 보내달라고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것을.
영은이는 미경이나 선미가 쉬는 시간에 풍금으로 치는 모습을 열심히 봤다가,
집에 와서 종이에 피아노 건반처럼 그려놓고 따라 흉내를 내 보았다.
어쩌다 미경이나 선미가 없을 때는 풍금 앞에 앉아서
'엘리제를 위하여'의 앞 소절을 따라 쳐 보았다. 잘 치는 친구들만큼은 아니지만,
비슷한 멜로디 소리가 나는 것을 알고, 영은이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영은이는 집에서 밥을 먹다가도, 숙제를 하다가도,
심부름을 하다가도, 놀다가도
풍금의 건반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심지어 꿈속에서 영은이는 풍금을 아름답게 연주했고,
그랜드피아노 앞에 선 자신을 보았다.
영은이는 차마 피아노를 사달라고는 못하고,
엄마에게 멜로디언을 사달라고 조르고 또 졸랐다.
그리고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제발 저에게 멜로디언을 주세요.'
당시 멜로디언은 3만 원이었으니,
운동화가 3000원인 것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비싼 물건이었다.
영은이는 엄마가 시장에 다녀올 때마다 확인을 해보았으나,
번번이 멜로디언이 없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땐 어찌나 실망스러웠던지,
그 좋던 밥맛이 없어졌다.
"엄마, 멜로디온 사 왔나?"
"은아, 다음에 사주꾸마."
"맨날 사준다고 해놓고 너무한 거 아이가?"
"가시나야, 다음에 사준다 안 하나."
영은이의 기도는 효과가 있었다.
몇 개월이 지나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던 가을,
멜로디언 생각도 시큰둥해지던 그날,
드디어 꿈이 이루어졌다.
엄마가 시장에서 멜로디언을 사가지고 왔다.
영은이의 큰언니가 보다 못해 엄마에게 압력을 넣었다.
"엄마, 영은이 저래 멜로디언 노래를 부르는데 사주라."
"알았다."
영은이 엄마는 큰딸의 말은 새겨 들었다.
영은이 보다 열 살이 많은 큰 딸은 곧 영어교사가 될
똑똑한 딸이었으므로.
영은이는 새 멜로디언을 가지게 되어 얼마다 좋았던지,
식사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멜로디언과 함께 보내었다.
음악책을 끼고 한 음 한 음, 후후 불어가며 열심히 눌렀다.
두 손으로 치게 되면, 한 음은 소리가 나지 않아도 괜찮았다.
중요한 건 영은이가 멜로디를 연주한다는 것이었다.
[학교종이 땡땡땡]부터, 시작해서 [높다 높다 비행기], [엘리제를 위하여]까지
영은이는 수많은 레퍼토리를 가지고 하루하루 열심히 연습했다.
어떤 날은, 시간 가는 줄을 몰라서 몇 시간 멜로디언을 불었더니
입술은 퉁퉁 불고, 머리가 너무 아팠다.
힘들어도 즐거웠던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영은이는 멜로디언이 좀 시시해졌다.
오래 불면 침이 고여 닦아내야 했다.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는 멜로디언이.
그리고 잔소리도 들어야 했다.
"가시나야, 시끄럽다. 그만해라."
얼마 지나지 않아, 영은이는 피아노가 갖고 싶어졌다.
영은이는 그때 이미 깨달았다.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게 되어도 그 기쁨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손에 넣은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시하게 되고,
더 좋은 것이 가지고 싶어 진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