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겨운 전화벨 소리
때는 제법 쌀쌀해진 11월.
1983년도.
따르릉, 따르릉.
또 전화벨이 울렸다.
"어디신데예?"
"광안 횟집에 연탄 백장이라 캐라."
"네, 광안 횟집이라예? 알겠심니더."
다행이다. 오늘은 전화를 건 분의 발음이 또렷했다.
가끔 알아듣지 못하면 영은이가 되묻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리는 때가 있다.
어린 영은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당황했다.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곧잘 주문전화를 받아온 영은이는
4학년이 되자 제법 능숙해졌다.
다만 지금 텔레비전에서 방영되고 있는
'빨강머리 앤' 만화를 보다 말고 외투를 껴입고,
배달건을 알리러 가야하는 건 영은이에게 좀 가혹했다.
마침 앤이 배를 타고 죽은 척 연기를 하다
곧 물에 빠져 죽을 지도 모를 일촉즉발의 상황이기에.
"언니야, 이거 다 보고 가믄 안되긋나?"
"안된다 가시나야. 빨리 댕겨 온나."
영은이는 툴툴거리면서 신발을 신었다.
겨울이 다가오는 길목에서 바람조차 얼굴을 꼭 할퀴는 것 같았다.
영은이는 괜히 길가의 돌을 주어서 멀리 던져버렸다.
해변 길을 따라 연탄창고로 가는데 갈매기들이 끼룩끼룩 날아다녔다.
그러다 갈매기 한 마리가 영은이 가까이 날아왔다.
영은이는 손으로 그 갈매기를 내쫓았다.
'겁도 없는 갈매기네.'
갈매기는 그새 멀리 날아올랐다.
바람은 짭쪼름한 맛을 남기며 지나갔다.
영은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영은이는 창고 앞 칠판에 분필로 주문을 써 놓았다.
'집에 가믄, 만화도 끝났겠네.'
영은이는 창고 앞에 놓인 깨진 연탄을 발로 차버렸다.
괜히 운동화에 연탄 가루만 묻었다.
시장에서 3000원 주고 새로 산 하얀 운동화인데.
영은이가 찌푸린 얼굴로 연탄 가루를 털고 있는데,
영은의 부모님이 배달을 마치고 빈 리어카를 끌고 좁은 골목길을 나왔다.
"어데서 전화왔노?"
"횟집에 연탄 백 장이요."
"오야, 영은이가 이따 횟집에 갈 때 리어카 좀 밀어주라."
"네?"
엄마가 허리를 다쳐서 졸지에 리어카를 밀게 된 영은이는 거절은 못하고,
누가 자기를 보기라도 할까 봐 창피했다.
영은이는 너무 힘이 세서 자신이 잘하기라도 하면,
아빠가 다음에 또 시키기라도 할까봐,
연탄 오십 장을 실은 리어카를 최대한 살살 밀었다.
특히나 가장 힘을 줘야 할 오르막 길에서 영은이는 거의 힘을 주지도 않았다.
영은의 아빠는 다 알고도 언덕을 지나 잠시 리어카를 세우고,
영은이에게 500원짜리 동전을 내밀었다.
영은이는 집에 오는 길에 만두집에 들러서 500원어치 군만두를 샀다.
만둣집 사장님이 군만두를 구울 동안,
영은이는 빨간 손잡이 달린 플라스틱그릇에 오뎅 국물을 떠서 마셨다.
짭짤하고 고소하고 뜨뜻한 오뎅국물은 너무너무 맛있었다.
집에 가서 영은이 언니들과, 동생과 만두를 2개씩 먹으니 금새 사라졌다.
영은이는 힘도 안썼는데,
아빠가 만두를 사주신 사실을 깨닫고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영은이는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전화벨 소리만 들으면 스트레스를 받았다. 다행인 것은 전화벨소리를 클래식 음악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영은이는 바흐의 시칠리아노로 전화벨소리를 변경했다.
더이상 전화벨 소리에 부담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래도 전화통화가 길어지면 영은이는 참을 수가 없었다.
영은이는 남자친구와도 긴 통화는 힘들었다.
특히 자주 전화를 거는 사람을 싫어했다.
전화벨소리, 예전의 따르릉 소리는 트라우마가 되었다. 전화만 받으면 나가야했으니까.
몹시도 추운 겨울엔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