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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트라 Aug 28. 2022

당신은 얼마나 자기 객관화가 되어 있습니까?

나를 한 발자국 떼고 보는 연습에 대하여


"인간은 자아성찰을 할 줄 알아야 사람 대우를 받지."



친구들과 대화하다 인류애가 바닥으로 꺼지면 저 말부터 나오는 게 일상이다. 나는 사람이라면 응당 자기 객관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각보다 본인은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 아니니까. 남들이 보는 내 모습과 내가 보는 내 모습의 간극은 얼마나 큰가.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것에서 객관화를 할 수 있고, 내가 더 괜찮은 사람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밑바닥을 보는 걸 두려워한다. 그 모습을 보고 나면 내가 고작 그런 인간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 상황이 싫고 두렵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의 밑바닥을 회피하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밑바닥의 내 모습을 인정해야 비로소 나를 알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한다. 이 글을 쓰는 나를 포함해 누구나 더럽고 추악한 모습을 갖고 있다. 다만, 밑바닥을 어떻게 표출하는지, 그리고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그릇을 가늠할 수 있다.




나도 괜찮은 사람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나는 인성이 좋지 않고, 늘 화가 나 있으며, 무슨 상황이든지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사람을 쉽게 용서할 줄을 모른다. 나의 타고난 성향은 타인의 부정적인 모습부터 파악하는데, 정말 괜찮은 사람은 그 부정적인 모습을 안고 가게 만든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만 신뢰를 주는 경향이 심하다. 타인의 대한 편견을 부수는 것, 이건 내가 평생 깨부숴야 할 숙명이다.


이런 나의 밑바닥은 돈이 없어 남들에게 할 수 없이 빈말로 기어대는 모습이다. 친부에게도 그랬고, 엄마의 늙은 남자에게도 그랬다. 제일 그런 모습을 보인 건 엄마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비참했던 건 친구에게 소액의 돈을 빌리는 내 모습이다. 그것만큼 비참했던 적이 없다. 어떻게든 깔끔히 돈을 갚았다 해도 내 상황을 가족이 아닌 남에게 알리는 것만큼 참담한 순간은 없다. 나는 혈육에게조차 그런 말을 하는 자체가 자존심 상한다. 내가 능력이 없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니까. 대학교 졸업 이후로 그런 적은 없지만, 돈 얘기를 남에게 할 때마다 빌빌 대는 내 모습이 죽기보다 싫다.




또 있다. 상대방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않거나, 내 기준에 들어맞지 않은 행동을 반복했을 때 불 같이 화를 내는 모습. 여차하면 살인할 눈빛으로 상대방을 쏘아보며 화를 낸다. 친구로부터 내게 그런 모습이 있다는 말을 몇 년간 들은 후에야 뒤늦게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니 내가 어릴 때, 내 친부모는 나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았고, 내 의견이 묵살당한 경험이 많아 생긴 생존 습관이다. 최대한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하지만, 가끔 가다 보이는 그런 내 모습을 받아들이고 상대방에게 사과하려 한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에 대한 결핍, 그리고 남자에 대한 편견이 강하다. 내 친부가 그랬듯이 남자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는 '성매매', '외도', '원나잇' 등등 성적인 키워드가 대부분이다. 난 내 결핍을 메우려고 남자가 필요한 엄마를 비판했고, 자립심과 독립심을 기르게 됐다. 남자에 대한 편견이 심한 나는 애인과 함께 하는 시간이 혼자 있을 때보다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면 그 관계를 가차 없이 잘라버린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있다. 내 직업을 무시당할 때 나는 불같이 화낸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내가 하는 일에 나 스스로 확신이 들지 않을 때도 있었고, 내 나름의 계획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마케팅이라는 직무에 대한 사회적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무엇보다 내가 꿈꿔왔던 마케터와 업무를 허덕이며 간신히 소화시키고 있는 현실의 나를 비교했었다. 이걸 인정하고 나니 내 직업에 자부심이 생겼고, 원래 내가 잘하는 기획이란 직무를 할 수 있음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렇듯 나 역시 우매하고 멍청하다. 나도 참 철이 없고 고집이 세다. 내 자아는 어른인 척하는 가짜의 나와 18살짜리 어린아이인 진짜인 나로 구분된다. 이렇게 내 자아를 구분할 줄 알게 된 게 나름의 깊은 성찰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내 옆에서 끊임없이 나에 대해 말해주는 친구들 덕이다. 그 친구들과 대화하며 '친구들이 보는 나''내가 보는 나'의 모습을 비교하고, 그 간극을 좁히는 연습을 수없이 했기에 그나마 사람 같은 지금의 내 모습까지 올 수 있었다.


혹자는 비교하는 행위가 자존감을 낮춘다고 하는데, 비교 값이 있어야만 간극을 좁힐 수 있다. 다만, 그 비교는 나에게만 초점을 두고, 타인은 제외되어야 한다. 나 스스로 분석이 돼야 타인에게 배울 점을 찾을 수 있다. 수많은 책이나 강연에서 추상적으로 말하는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이 바로 이 과정이다.




만약 내가 나의 밑바닥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나의 사례로 말미암아 독자들도 한 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단언컨대, 나는 열등감 덩어리에 남들을 깎아내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내 자존심을 세우기에 급급했을 것이다. 비교 대상의 외모, 학력, 집안 등등 모든 것을 분석해서 나의 상황, 외관을 비교하며 살고 있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앞서 말했듯이 나의 밑바닥을 인정하기가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모른다. 본인은 길을 선택해서 나름대로 잘 가고 있다고 착각하는데,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면 그 사람은 허황된 삶을 살고 있는 걸 알게 된다. 그 간극을 본인이 먼저 인지하지 않은 상태로, 타인에게 먼저 들켜버리면 그것대로 아주 우스워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간극을 맞추는 연습을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해야 한다.




사실 나와 타인이 합심해 나의 이상한 모습을 하나하나 분석한다는  꽤나 불쾌하다. 부끄러워서 얼굴이 벌게지며 인정해야 하는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해야 한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성숙함을 지향해야 되지 않겠는가?  성숙함으로 누군가와 대화할  있고, 누군가를 가르칠  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지혜라고 배웠다.


나름의 논리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내 밑바닥을 글로 쓰는 게 쉽지는 않다. 글로 쓰면서도 이게 맞나 싶은데, 그럼에도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분명하고 명확하다.


인정할 줄 아는 것에서부터 한 걸음 더 성장한다는 것.

자기 객관화는 내 그릇의 크기를 결정하는 중요한 과정이자 겸손함이라는 것.

그 과정에서부터 선한 영향력이 실현된다는 것.


인류애가 아직 5%나 남아 있는 29살짜리가 감히 말해 본다. 인간은 이래야만 사람 취급을 받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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