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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트라 Dec 22. 2023

정신과 약을 먹게 된 지 3주 차 됐습니다.

인간성의 마름모에 관하여


"뿌리가 깊으시네요. 이제 덜 채워진 부분을 찾아내서 채웁시다."



강도가 약한 약을 복용 중인데도, 불안증이 많이 잠잠해졌습니다. 잠들기 2시간 전에는 수면유도제를 먹는데, 새벽에 1~2번 깨는 것 말고는 다시 곧잘 잠듭니다. 수면의 질이 확실히 높아졌고요. 이제 사람 사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제가 얼마나 불안해하고, 강박에 시달렸는지 알 수 있는 매 순간입니다. 오늘은 정신과를 다닌 지 3주 차가 되었고요. 의사 선생님이 말씀해 주신 인간성의 마름모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연말에는 어느 기업이든, 병원이든 모두 바쁜 하루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제가 다니는 정신과도 예외는 아닙니다. 11월 말에는 12월 예약이 이미 마감되었고요. 내년 1월에나 예약이 가능합니다. 대신 휴가가 길더라고요. 복지라고 하면 복지인 것 같습니다. 3주 정도 쉬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제 약을 3주 치나 주셨거든요.


저번에는 분노와 스트레스의 원인을 묻는 문답 검사를 받았습니다. 오늘 그 결과를 들었는데요. 역시나 저는 그리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나 봅니다. 다소 스트레스 수치가 높아서 일시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전체적으로 균형 있게 뿌리가 깊다고 하셨습니다. 역시 제 예상대로 최근에 겪은 일들 때문에 극도의 불안증을 보인 게 맞나 봅니다.




의사 선생님이 말씀해 주신 마름모가 꽤 흥미로웠는데요. 인간성을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하셨더군요. 정식 명칭은 모르겠고 제가 기억하는 대로 적어보면 이렇습니다. 외부 자극(=일) - 꿈과 이상 - 사회적 지지 - 나(자아)입니다. 마름모로 표현하면 아래 그림과 같습니다.


채울수록 마름모가 커지고, 부족할수록 마름모가 작아집니다. 저는 저 큰 마름모 윤곽선 중에서 두 번째로 큽니다. 그래서 의사 선생님이 뿌리가 깊다고 하셨지요. 하지만 강한 외부 자극 때문에 일시적으로 제 자아가 위축되어 있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사회적 지지나 꿈, 이상적 가치는 그에 따라 조금 줄어든 상태이지요. 의사 선생님은 헛된 희망을 심어주지 않으시더군요. 현실적이고, 치료의 방향을 명확히 알려주셔서 너무 좋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제 치료 방향을 외부 자극을 줄이는 게 아니라, 꿈과 이상적 가치, 사회적 지지를 회복해서 제 자아를 다시 완벽히 되돌려 주시는 것에 집중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약의 도움이기에, 제가 많이 노력해야 한다고 하셨고요. 그 예로 킥복싱 같은 분노와 에너지를 표출할 수 있는 운동을 시작하라고 하시더군요.


지금 부트캠프이니 뭐니, 백수임에도 배울 게 너무나 많아서 운전면허와 운동을 미루고 있습니다. 킥복싱을 정말 배우고 싶은데 시간이 나질 않네요. 시간을 내서라도 운동을 해야겠습니다. 아무튼 의사 선생님은 제 상태를 꽤 '안정적인 마름모'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제가 신입사원 시절에, 그때 당시 제 나이를 먹었던 건방진 팀장이 생각나네요. 실력으로는 대리급도 안 됐던 것 같은데, 이 말은 즉슨 지금의 저보다 한참 일을 못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팀장은 고객사의 컴플레인으로 인해 겸사겸사 개인사정 핑계를 대면서 퇴사를 했거든요. 아마 본인도 경위서를 쓰고, 그때 당시 본부장님도 경위서를 썼던 걸로 기억합니다. 제가 아무것도 몰랐던 그 시절에, 그 팀장이 고객사에게 쓴 메일을 보고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만큼 일도 못하고 건방진 위인이죠.


아무튼 그 팀장이 퇴사하면서 전 직원에게 책 한 권씩을 선물해 주더군요. 기가 막히게도 제게는 '뿌리 깊은 나무'를 선물하더군요. 그날이 수요일이었던 것 같은데, 평일엔 웬만해서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그날 너무 열이 받아서 그 당시 남자친구에게 화풀이를 했던 게 기억납니다. 그 책은 당연히 술 마시고, 찢어서 버렸고요. 아직 그 팀장이 일을 하고 있는지나 모르겠습니다. 실력이 워낙 없어서 근근이, 적당한 규모의 회사에서 근무하겠죠. 뿌리가 잘 흔들리는 인간은 본인이라는 걸 모르나 봅니다.




저는 실력도 없는데, 건방진 사람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그래서 후배들한테 더 무섭게 하고요. 요새 친구들은 본인이 잘난 줄 알고, 대충 멋대로 휘갈겨서 상사에게 일을 던지더군요. 그 친구들 덕분에 회사에서 큰 소리도 내보고, 노동청에 찌르려면 찌르라고, 너 같이 일 못하는 애는 데리고 갈 필요가 없다고 모욕을 준 적도 있죠. (물론 회의실에서 면담할 때만 그럽니다.) 저는 극한의 꼰대입니다. 이런 미친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꼰대로 사는 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저를 알고 지낸 연장자 분들은 모두 저보다 나이가 많아서 다행이라고  정도로 꼰대입니다. 하지만, 나르시즘이 만연하고, 자아만 비대한  어린 친구들을 상대하려면  스스로 갑옷을 입고, 창이 되어 찔러야만   있습니다. 그래야  친구들이 알아먹거든요. 귀에 보청기를 심어줘야 하나 봅니다. 예의범절도 모르는 어린 친구들은 진짜 사회생활 하지 말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튼 저는 외부 자극에 취약해진 상태이고요. 그래서 제 자아도 조금 위축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금방 회복될 거라고 의사 선생님이 확신을 주셔서 그렇게 걱정은 되지 않습니다. 이제 저는 외부 자극에 의한 스트레스를 줄일 방법을 알아내야 하고요. 의사 선생님과는 제 자아가 위축된 원인을 찾아내야 합니다. 가령 사회적 지지 부문에서 약해져 있는 부분은 무엇인지, 꿈이 좌절됐던 적은 언제인지 등등 자세하게 알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주는 문장을 완성하는 검사를 받았습니다. 어려운 부분은 없었는데, 유독 '나의 성생활은 000'이라는 부분이 잘 써지질 않더군요. 실제로 어떻게 했지? 별다른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원하는 남성상은 000'이라는 항목은 너무 자세하게 써놔서 의사 선생님이 놀라시지 않을까 싶네요.




남자와 성생활에 관한 질문이 다소 있었는데, 남자는 그렇다 치고 성생활에서 어떻게 적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워낙 민감한 부분이기도 하고, 사실 여자의 포지션은 수동적이다 보니, 그런 측면에서 주체적으로 했던 적이 없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조금 나빴고요.


하지만 다시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수컷은 어디까지나 유전자 제공자일 뿐, 그 유전자마저 선택할 수 있는 건 암컷입니다. 모든 포유류나 파충류에서 그렇습니다. (실제 과학적으로 증명된 내용입니다. 억울하신 남성 분들은 암컷들이라는 책을 읽어 보세요.)




아무튼 저는 3주 뒤, 2024년 1월 8일에 다시 갈 예정이고요. 제 문장 검사 결과가 기대됩니다. 뭐라고 하실지 매우 궁금하네요. 좌뇌, 우뇌 사용하는 비율을 정확히 49:51이라고, 이런 비율은 처음 본다고 하시던 의사 선생님.

어떤 결과로 놀라실지 궁금해지네요.



저는 뿌리 깊은 안정적인 마름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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