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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트라 Dec 12. 2023

정신과 약을 먹게 된 지 2주 차 됐습니다.

불안과 강박에 대하여


"부단히도 애쓰셨네요. 이제 쉬는 법을 같이 알아가 봅시다."



술을 마실 때마다 터져 나오는 분노는 마땅히 표출했어야 할 응어리였기에, 여태까지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늘 참고 살아왔거든요. 응당 마땅히 그랬어야 할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새 들어 점점 미쳐가는 제 자신을 보면서 이대로 가다가 아예 제 인생이 망가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올해만 들어 경찰관들을 몇 번을 봤는지 셀 수가 없네요. 오늘은 제가 정신과를 다니게 된 경로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지난달에 작은 외삼촌이 데리러 왔던 그날, 저는 지구대 안에서 자살예방센터에서 파견 나온 상담사 분과 오랫동안 대화를 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정신병원도 입원하고 싶다고 의사표현을 했던 터라, 우선 빠르게 진료받을 수 있는 정신과부터 찾아주시기로 했습니다. 저의 이런 사정이 자살예방센터와 정신건강복지센터, 이렇게 두 곳에 동시에 의뢰가 들어갔는데요.


저는 정신건강복지센터를 택했습니다. 나이가 조금 있으신 상담사 분은 저를 편안하게 해 주셨고, 전화로도 편안하게 해 주셨지만, 직접 센터에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더 편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지센터의 상담사 분은 저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셨고,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직은 언제쯤 할 예정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등등 상세하게 물어봐 주셨습니다.




우선 저는 상담사 분께 치료가 시급하다는 걸 의논드렸고 동의하셨습니다. 지금 저의 상태로 새로운 회사에 입사한다면 더 큰일이 날 것 같거든요. 빠르게 지원받을 수 있는 내용들을 상세히 설명해 주셨고, 저의 경우는 성본과 개명하는 과정이 남아 있어, 추후에 변경하면 절차가 복잡하여 개명 이후에 지원받는 것으로 협의하였습니다.


상담사 분은 정신과는 무조건 집 주변으로 다니는 것이 좋다고 하셔서 제 거주지 주변으로 3곳 정도 추천해 주셨습니다. 예약이 빠르게 되는 곳으로 결정하였습니다. 복지센터에서 추천해 준 병원인만큼 전문성은 말할 것도 없을 것 같아 의사 선생님의 약력이나 경력은 별도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정신과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의 일들을 말했고, 술은 얼마나 먹는지, 흡연은 얼마나 하는지 등등 세세한 것들을 물어보시더군요. 의사 선생님은 말하고 있는 제 표정들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제 말에 집중하시더니 이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표정에서 우울감이 느껴지네요. 우울과 불안은 늘 같은 선상에 있습니다. 00님은 지금 불안이 더 높은 상태이지만, 우울감은 평상시에 느꼈을 것이고, 이미 오래전부터 그래왔을 수도 있어요."


별말씀을 드리지 않았는데 제 상태를 정확히 맞추시더군요. 역시 전문가의 눈은 속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처음 방문한 날, 우울과 불안에 관한 심리 검사와 뇌파 검사까지 받았습니다. 우선 제 신체가 적응하도록 신경안정제와 수면유도제 등등을 처방받았고요. 이후 검사 결과를 들으면서 약을 어떻게 먹어야 할지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그날 감사했던 건, 의사 선생님이 여러 가지 힘이 되는 말씀을 해주셔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살면서 정신과를 오게 될 줄 모르셨겠죠. 앞만 보고 달려오셨으니 스트레스를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모르실 거예요. 이제 만 29세이시니 30대에는 어떻게 스트레스를 관리할지 한번 같이 알아가 보시죠."




검사 결과가 나온 오늘, 저는 다소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상보다  상태는 그리 심각하진 않았지만, 불안과 강박 점수가 높음으로 판정받는 60점보다 20 높은 80점을 받았기 때문이죠. 다행히도 저는 좌뇌와 우뇌를 49:51 비율로 쓰고 있더군요. 흔치 않은 비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집중력에서  상태가 탄로 났습니다. 집중력이 좋다가도  번씩 정신적인 충격을 받으면  낮아지는    있었습니다. 들쑥날쑥한  사고 회로를 보게 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뇌의 휴식을 배터리로 비유하시더군요. 저는 뇌의 배터리를 70% 정도로 유지하면서 계속 쓰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자면서도 휴식을 취해야 하는데, 수면의 질이 좋지 않기에 배터리가 더 이상 충전이 되지 않았다고 하시더군요. 잠을 못 자니 불안이 커지고, 걱정도 많아지니 자연스레 강박이 생기나 봅니다.




저를 3~4년 동안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경주마' 같다는 것을요. 쉬지 않습니다. 아예 쉬는 법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네요. 시야가 앞만 향해 있습니다. 옆이나 뒤를 신경 쓰지 않은 채 무조건 달립니다. 쉼 없이 달리다 보니 넘어질 때가 많지요. 마라톤처럼 잠깐 쉬기도 하고, 걷기도 해야 하는데 저는 그런 과정이 없습니다. 무조건 달리거든요.


그래서 저는 해외여행을 가본 적이 없습니다. 늘 이유가 있었거든요. 대학생 때는 알바를 해야 해서, 자격증을 따야 해서, 대학원 입학 준비를 해야 해서 휴학을 하지 않고 졸업을 바로 했고요. 대학교 4학년 때는 졸업 논문 쓰랴, 인턴 생활하랴 밤을 새우는 날이 많았습니다. 졸업한 이후엔 진로를 찾지 못해서 내일배움카드로 지원을 받으며 학원을 다녔습니다. 잠시 폐인처럼 몇 개월 정도만 살았을까요. 그 이후엔 광고대행사에 신입으로 입사해 미친 듯이 일만 하면서 살았습니다.




저에게 유일한 자유는 친구들과 오직 춤을 목적으로 가는 클럽과 밤새 마시는 술자리입니다. 정말 미친 듯이 놉니다. 당장 몇 분 뒤에 세상이 멸망이라도 하는 것처럼 부어라 마셔라, 정신을 놓고 춤추며 놉니다. 겉으로 보기에 저는 굉장히 자유분방한 사람입니다. 놀 때 내일이 없는 것처럼 놀거든요. 그래서 오해를 많이 삽니다.


하지만 저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늘 머릿속에 불안과 강박이 흘러넘쳐 작은 계획이라도 윤곽을 짜놔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래서 저는 비전 없는 사람, 계획 없는 사람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저에게 불안과 강박은 '성공'입니다. 저는 반드시 성공해야 합니다. 이것도 제 합리화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성공하기 위해 남들이 놀 시간에 쉼 없이 공부하고, 일하고, 파고들었습니다. 저는 계속 앞으로도 그러겠지요. 쉬지 않는 경주마처럼 달리겠지요.




하지만 이제 옆을 돌아보는 여유 있는 경주마가 되려고 합니다. 때때로 힘들 땐 걷기도 할 거고요. 발이 아프다고 투정도 부릴 겁니다. 그렇게 살아야 성공할 수 있겠더군요. 저에게 성공이란, 제 월 수입을 1천만 원~15백만 원 정도로 만들어 재산 관련 소송비를 지불하면서 승기를 잡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걷는 법과 숨 쉬는 법, 아프다고 티를 내는 법도 알아야겠더라고요.


정신과 선생님이 말씀하시더군요.

"그동안 부단히도 애쓰셨네요. 이제 내려놓는 연습을 하셔야 됩니다. 이제 쉬는 법을 같이 알아가 보시죠."

의사 선생님의 이 말씀이 참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약을 먹기 시작한 이후부터 새벽에 깨긴 하지만, 바로 잠들 수 있을 정도로 많이 호전됐거든요. 게다가 환자를 생각해서 배려심이 묻어 나오는 저 말에 깊은 고마움을 느낍니다.



저는 이제 신생아가 막 태어난 것처럼, 숨 쉬는 법,

쉬는 법을 배워 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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