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페트라 Jun 29. 2024

정신과를 다닌 지 7개월 됐습니다.

평온함과 불안에 대하여


"이제 부드러워지는 약으로 바꿀게요."



제가 다니고 있는 정신과는 원장님이 한 분만 계시는 작은 규모의 병원입니다. 원장님은 남자분이시고요. 책상 옆에는 기타와 가톨릭 관련 서적과 정신 분석 관련된 책들이 있습니다. 남자분이시라 처음에는 말을 떼기가 힘들었는데 이제는 주치의 선생님에게 그 간의 질병 이야기들과 근황 얘기를 나누는 데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제 저는 안정을 많이 되찾아서 강도가 약한 약으로 바꿔주셨습니다. 정신과를 다닌 지 어느덧 7개월이 되었네요. 오늘은 평온함과 불안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저는 약을 먹기 전까지 항상 분노를 원동력으로 살아왔습니다. 가족에 대한 분노, 친부에 대한 분노, 편견에 대한 분노 등등 제가 분노하는 것들을 나열하자면 밤을 새야 하지요. 사실 평온함이라는 단어 자체가, 그 상태 자체가 저에게는 게으름으로 다가왔던 것 같네요. 무언가 하지 않으면 무기력함에 빠져버리는 경주마 같은 습성을 가진 저는 가만히 있는다는 게 무척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작년에 퇴사하자마자 여행을 가지 않고, 이것저것 많이 바꾸려고 노력했지요. 결국 그것도 제 인생에서 큰 변곡점이 되었지만, 그때 당시에 갑자기 직장에 가지 않는 자유로운 제 상태가 무척 불안했습니다. 그만큼 오랫동안 치열하게 일해 왔으니 조금 쉬어도 되는데 말이죠. 저는 이 나이 먹도록 불안증에 시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최근 첫 째 오빠가 죽고 제 인생에서 또 다른 변곡점이 생겼습니다. 가족들에게서 받는 기대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는데요. 그러니까 제 스스로 부담감을 지우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가족 중에서 제가 유일하게 대졸 출신이거든요. 첫 째 오빠, 둘째 오빠도 모두 대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했기 때문에 유일하게 제가 (그것도) 4년제 대졸 출신입니다. 대학의 이름을 떠나서 '4년제' 자체에 힘을 주시는 부모님은 제게 의지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저를 인간 백과사전으로 생각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사회, 정치, 경제 등등 모든 분야를 제가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시죠. 저는 이런 생각 때문에 나중에 나이가 든 부모님을 제가 부양해야 된다는 책임감이 있었고, 인생을 마음대로 사는 오빠 새끼들 때문에 장녀라는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생기가 넘치던 저는 시들해지기 시작했고, 그 시들함이 작년에 정점을 찍었습니다.




공황장애와 발작을 심하게 겪고, 곪았던 모든 감정들이 터져 나왔을 때, 수면 위에 오른 제 어둠을 보았습니다. 그러다 첫 째 오빠의 죽음을 통해 절망을 보았지요. 첫 째 오빠의 장례식장에서 처음으로 양아버지와 엄마, 두 분 모두에게 나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하라고 울부짖었던 기억이 나네요. 내가 이렇게 된 건 모두 둘 때문이라고, 둘이서 나를 망가트렸으니 사과하라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부모님은 아마 그때 제 상태를 제대로 직면하셨던 것 같습니다. 많이 놀라 하셨던 기억이 나네요.


어쩌면 저는 부모님한테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어요. 저는 항상 모든 걸 혼자 해야만 했거든요. 혼자 알아보고, 혼자 정리해서, 부모님께 브리핑을 하고, 허락을 받아야 했으니까요. 이런 습관들이 오빠 새끼들에 대한 분노라고 해야 할까요? '모든 지원을 다 받았으면서 왜 그것밖에 못해? 나는 혼자서도 이만큼 했는데 왜 못해?'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오빠들한테도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제가 정신과를 처음 갔던 일이 생각나네요. 제 상태와 감정을 의사 선생님에게 말한다는 것이 아주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가족들한테서도 정신병자 취급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저는, 그때 병원에서 과호흡이 올 뻔했습니다. 예상외로 의사 선생님은 아주 평온하고, 부처님 같은 미소를 늘 유지하고 계셨고, 제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들어주시며 기록하셨지요.


"인생에서 정신과  지는 몰랐겠죠? 이제 천천히 놓는 연습을 해봅시다."라는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제가 정신과를 다니면서 주치의 선생님께 배우고, 약을 먹으며 계속 되새긴 것은 '가만히 있는 '이었습니다. 흔히  때리기인데요. 저는 매우 의식적으로 멍을 때릴 수는 있지만 습관은 아닙니다. 마치 배터리가 닳기 전에 뇌를 급속 충전하기 위한 수단이랄까요? 제게 아무 생각하지 않는 것은 '의식'입니다. 트라우마가 굉장히 강했던 저는  상태를 분석해 주시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따라 약을 먹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는 연습을 하다 보니 가만히 있는 것에 조금씩 익숙해졌습니다.




그러다 첫 째 오빠가 죽고 난 뒤로, 겪고 있던 트라우마는 모두 없어지고, 죽음에 대한 새로운 트라우마가 등장했지요. 절망 끝에 허무를 보았습니다. 명확한 트리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허무함은 제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끊임없이 찾아야만 진정이 됐었죠. 인생은 원래 고통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지만요.


그동안 의식적으로 해왔던 것은 오빠의 죽음으로 인해 모든 부담감을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도 이제는 놀고 싶을 때까지 놀라고, 영양제와 모든 재정적 지원을 하고 계시고, 하고 싶은 대로 살라고 하셨지요. 저는 정말 오랜만에 유년기 시절처럼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밤을 새우고, 늦잠을 자고, 뒹굴거리고 있습니다. 이불을 덮고 투니버스를 보던 어린 제가 생각나네요.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분명히 이런 날의 마지막에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는데 말이죠.




저는 요새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이미 저는 제 실력을 내보일 수 있을 만큼의 탄탄한 커리어를 쌓아 왔고, 어떻게든 먹고 살 길은 찾게 돼있고, 세상은 만만치 않지만 저를 진실로 위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자신감이 넘칩니다. 불안한 가정환경에서 자라왔다고 해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비록 남들보다 고통의 시간은 길겠지만, 결국 평화는 찾아오더라고요.


오빠의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찾아온 평화는 생각보다 괜찮습니다. 깊은 절망을 겪은 뒤, 제 곁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고마워할 줄 알게 됐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걸러진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고요. 요새 제 눈빛은 날카롭지 않고 부드럽다고 하네요. 저희 엄마가 저를 보고 애기 때 얼굴이 나왔다고 좋아하세요.



저는 고통을 꽤나 잘 견뎌낸 모양입니다.

마침내 저는 다시 밝은 빛으로 나왔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정신과를 다닌 지 5개월 됐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