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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원 Oct 13. 2022

함께여서 좋은 생활

좋은 관계는 환상이 거친 후에 더 단단해집니다

따님.

출근은 잘하셨어요? 늦잠 자고 일어나 헐레벌떡 머리도 못 말리고 뛰어나간 건 아니죠? 젊었을 때는 아침에 일어나기가 그렇게 힘들더니만 나이가 드니 자동적으로 아침에 눈이 떠지네요. 휴대폰도 만지작 거리고, 책도 뒤적이다가 에라이~! 일찍 움직이자, 하고 출근을 합니다. 그리고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산책을 해요. 대학의 교직원으로 일하는 가장 좋은 점은 도심 한 폭 판에서도 나무와 숲을 가까이할 수 있는 것이랍니다. 대학의 캠퍼스는 도심의 숨구멍 같아요. 이런 공간에서 하는 아침 산책은 보약 같고요.


어느 날인가 산책길에서 나이 지긋한 부부가 함께 걷는 것을 봤어요. 여성의 몸이 조금 불편해 보였는데, 두 분이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을 보니 난데없이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오더군요. 주례사에 흔히 등장하는 말이 현실에서 구현된 것 같은 감상적인 기분이 들었나 봐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서로를 생각하며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함께 한 두 사람의 시간이 눈앞에 나타난 것 같은 기분 말이죠. 두 사람의 시간 속에 담긴 무수한 희로애락의 역사가 함께 걷는 모습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 같았어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그 시간에 대한 경외감 같은 것이 느껴졌달까요.  따님이 공감하기엔 아직 먼 이야기일 수 있겠네요.


오래전부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하고자 한다면 서로의 관계를 돌보고자 하는 의지와 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요. 의지는 좋아하는 감정만으로 관계를 꾸려갈 수 없을 때 서로의 마음을 살필 수 있도록 하고, 정성은 서로의 가치를 높여주고 관계 자체를 보살펴 주지요. 매 순간 이런 마음을 유지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저는 이것을 좋은 관계를 위한 기본적인 태도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오래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환상이 빠져나가 버려요. 부부 사이에서도, 친구사이에서도, 직장 동료 사이에서도 아무튼 첫 만남을 가능하게 했던 끌림과 매혹과 뭐 기타 등등의 알 수 없는 매력들이 자취를 슬슬 자취를 감춰버리고 만답니다. 그런데 그런 환상이 거친 뒤에 더 단단해는 관계가 있어요. 의지와 정성이 작용하는 관계이지요. 산책길의 노부부에서 제가 느낀 감정의 실체가 이것이지 싶어요.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하게 함께 하기를 그만두는 일이 생기기도 하지요. 사람과 사람이 이별을 할 때에도 서로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이때 존중을 잃지 말라는 말은 의미가 좀 모호하긴 해요. 헤어지는 마당에 존중이라뇨. 그럴 정도면 계속 함께 해도 좋지 않을까 뭐, 이런 생각도 들죠. 이별의 태도로 존중을 말한 이유는 이별이 함께 했던 좋은 시간을 부정하는 것이 되어서도, 고통스러운 시간의 핑계가 되어서도 안된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관계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어서도 곤란하고요. 그러니 이별의 순간에 함께 한 시간을 부정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관계에도 생로병사가 작용하는지 살다 보면 만나고 헤어지는 일도 있고, 소원해졌던 관계가 단단하게 이어지는 경우도 있더군요. 인간관계는 그렇게 물처럼 흐르기도 해요.   


어째 요즘 시대에 잘 맞지 않는 고루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사람들 관계에서만은 제가 좀 보수적인 성향이 있습니다. 사람을 가려서 사귀고 한 번 관계를 맺은 사람들과는 오래 교류하는 태도가 보수적이라면 좀 보수적일 수 있겠습니다. 따님은 따님 나름대로 사람을 만나고 사귀는 기준이 있을 겁니다. 그렇게 만나는 사람 가운데 특별한 의미를 가진, 오래오래 한 집에서 함께 살고 싶은 사람을 만나게 되거든 저의 생각을 한 번 참고해 주세요.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의지와 정성을 쏟을 마음이 있는지를요. 이쯤 되면 우리 부부가 어떠한지 궁금하겠죠? 어떤 것 같습니까? 주말 부부라는 생활의 형태가 인간관계에 대한 저의 철학을 근근이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는 말로 대신하겠습니다(으윽 찔린다).


왜 식당에는 3인 테이블이 없을까


따님이 싫어하는 말이 있지요. '4인 가족 테이블에서 꽉 차게 밥 좀 먹어 보자'. 세 식구인 저희 가족이 외식을 하면 항상 4인 테이블에 앉게 되는데, 그때마다 제가 하는 말입니다. 혼자 사는 것이 좋다고 했다가, 4인용 테이블의 한 자리를 채우랬다가 이랬다 저랬다 하는 저를 보고 따님은 한 가지만 하라고 하지요. 저도 제 마음을 잘 모르겠습니다. 이 문제 대해서는 제 마음 따윈 중요하지 않지만 말이에요. 이 글의 제목이 '함께여서 좋은 생활'입니다. 그러니 누군가와 함께여서 좋은 몇 가지 목록을 뽑아보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함께여서 좋은 생활 1.  실용주의적 측면, 들어올 때 아이스크림 사 와요.

함께여서 좋은 생활 2.  쾌락주의적 측면, 키스 및 그 외

함께여서 좋은 생활 3.  주지주의적 측면, 한 인간에 대한 밀도 있는 탐구

함께여서 좋은 생활 4.  초월주의적 측면, 인간에게 허용된 거의 모든 감정을 경험하고 득도

함께여서 좋은 생활 5.  대체 불가,  따님의 존재


어떠십니까? 누군가와 함께 할 마음의 준비가 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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