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에 저장된 연락처를 지운다

지워진 이름, 남겨진 마음

by 시원

휴대폰에 저장된 사람들의 연락처를 지우기 시작했다. 퇴직을 하면서 일로 연결된 사람들의 연락처를 지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망설임 없이 삭제 버튼을 누르게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끝까지 망설이게 되는 사람도 있었다. 그 망설임은 서로에게 베푼 친절에 비례했다. 그러나 다시 연락할 가능성이 있을까 생각해 보면 일터를 떠난 상황에서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삭제! 그 후로 종종 휴대폰을 열고 저장된 연락처를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한때 막역지우(莫逆之友)로 금석지교(金石之交)한 관계였어도 오래 연락이 닿지 않은 자의 연락처는 휴대폰에서 삭제했다. 처음에는 고뇌하고 망설였다. 일로 만난 사람과는 다르지 않은가. 연락처를 삭제하는 행위가 그를 야멸차게 금 밖으로 밀어내는 것 같아 주저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보류! 그러나 망설이게 되는 연락처는 일 년 뒤 어김없이 삭제되었다.




그렇게 하나둘 지워나가다 보니, 휴대폰 연락처는 절반 이하로 줄었다. 허전하지는 않았다. 이제 나에게 연락할 사람은 정해져 있고, 내가 연락할 사람도 명확하다. 한때는 휴대폰 연락처가 곧 인맥이고 자산이라 여겼다. 전화 한 통이면 막혔던 일이 돌아가고, 누구누구를 통하면 일이 풀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식으로 해결할 문제가 나에게 없다. 이따금, 연락처가 삭제된 사람 중 누군가는 여전히 내 번호를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십중팔구 그에게 연락이 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에게 그가 그렇듯이, 그에게도 나의 몫은 이미 끝났을 것이므로 잊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연락처를 지운 건 나의 선택이었지만, 서로에게서 멀어져 가는 시간은 누구의 탓도 아니다. 관계란 특별한 사유 없이 소원해지기도 하는 법이니까.




오늘, 오랫동안 지울까 말까 망설이던 사람의 번호를 지웠다. 고마운 사람도 아니었고, 인간적인 애정이 남아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연락처를 볼 때마다 삭제 버튼을 누를까 말까 망설였지만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을 볼 때마다 분노와 기대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올라왔다. 한 번은 전화를 걸어올 것 같았다.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잘 지내고 있느냐고, 그때는 내가 미안했다고, 전화를 걸어와 형식적인 사과의 말이라도 그가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전혀 그럴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면서도 그런 상상을 했다. 그의 연락처를 지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내가 여전히 그에게 묶여 있다는 증거이다. 가장 먼저 지웠어야 할 이름을 가장 오래 붙잡고 있는 내가 미련스럽게 느껴졌고, 그 미련을 감당하고 있는 내가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 그 사람은 이미 나의 일상에서 빠져버렸는데, 나는 여전히 그에게 뭔가를 바라고 있었다. 오늘, 드디어 그의 번호를 지웠다. 당연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삭제 버튼을 누른 건 그를 단죄하는 것도 아니며, 잊겠다는 선언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에게 묶여있던 내 시간을 이제 놓겠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젠 그에게 사과를 받지 않아도 괜찮다.




이제 나의 휴대폰에 남아있은 이름은 많지 않다. 휴대폰 연락처를 지우기 시작했던 건, 저장 공간을 정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멀어진 사람들을 하나씩 떠나보내는 작업이었다. 동시에 사람들 사이에서 나를 붙잡고 있던 감정들을 하나씩 내려놓는 과정이었다. 처음엔 단순히 일과 관련된 이름을 지웠다. 그 다음은 오래 연락이 없던 사람들, 그러면서 마음속에서 망설이던 이름들도 하나씩 떼어냈다. 이름 옆에 붙은 감정까지 정리하니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던 먼지가 걷힌 기분이 들었다. 기분 탓이겠지만 휴대폰의 무게도 가볍게 느껴졌다. 남겨진 연락처를 훑어보면서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자주 연락하지는 않아도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 사람들,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할 수 있는 사람들. 하나 둘 줄어든 이름들 사이로 그런 사람들이 남았다. 선선한 마음이 담긴 몇 안 되는 이름과 그들의 연락처가 지금의 나에겐 더 필요하다. 이제는, 이 정도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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