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멈춰서는 산책

산책단상

by 시원

아파트 뒤편에 조그만 봉우리가 있다. 산이라기엔 너무 소박하고, 언덕이라 하기엔 나름의 기세가 있다. 나는 거의 매일 왕복 삼십 분쯤 걸리는 그 봉우리를 걷는다. 처음에는 운동삼아 시작했다. 지금은 그 길을 걷는 것이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의식이 되었다. 하루 한 번 혹은 두 번, 나는 산책을 한다. 산책을 예찬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나도 그중의 한 명이다. 그러나 내가 산책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걷기 그 자체보다 산책길에서 만나는 이웃들의 마음 때문이다.



누가 산책길을 쓸고 있는가.

눈이 많이 내리거나 낙엽이 많이 쌓인 날에는 어김없이 비질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간밤의 비바람으로 나뭇가지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겠다 싶은 날에도 산책로는 말끔하다. 평상시에도 마찬가지다. 칼바람이 불고 추운 날에도 찜통 같이 더운 날에도, 얼굴도 모르는 이웃들의 편의를 위해 수고로움을 감내하는 마음. 나의 산책은 그 마음 덕에 편안하고 안전하다. 그 선한 마음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속으로 읊조린다. "고맙습니다!"


어느 날 봉우리에서 공원으로 연결되는 돌계단 하나가 위험하게 삐걱거렸다. 다음 날 그 계단에는 "조심!"이라고 쓰인 종이가 붙어 있었다. 이웃의 불편을 짐작하고 외면하지 않는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계단을 그냥 지나쳐 버린 나의 마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산책길에서 만나는 이웃들 덕에 나는 길에서 멈춰서는 법도 배운다.



이토록 예의 있는 산책자들이라니

"보고 싶은 울 막냇동생 사랑한다." 언젠가 눈이 내린 아침 산책길에서 애틋한 문장과 마주했다. 산책길에 단정한 글씨체로 쓰인 짧은 문장 앞에서 이런저런 상상을 했다. 누가 썼을까. 추운 새벽 산책길, 하얀 눈길에 쭈그리고 앉아 또박또박 막냇동생을 그리워하며 글을 써 내려간 누군가의 굽은 뒷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이런저런 상상도 했다. 막냇동생이 멀리 떠나가 있는 상황인가, 아니면 어디가 많이 아픈 것인가. 어떤 상황이든 글쓴이의 마음이 그대로 보이는 듯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문장을 피해 간 수많은 발자국들이었다. 누군가의 그리움을 차마 훼손할 수 없는 마음들. 그 마음이 너무 귀해서 나는 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KakaoTalk_20250713_222306408.jpg 보고 싶은 울 막냇동생 사랑한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건

세상의 작고 예쁜 것들을 좋아한다. 작고 앙증맞은 것들이 보이면 자연스럽게 미소를 짓게 된다. 세상의 작고 예쁜 것 중 최고는 단연, 어린아이 들이다. 산책로가 작은 공원과 접해 있고, 주변에 유치원이 있는 탓에 산책길에서 종종 어린아이들을 만난다. 작고 예쁜 인간들이 짹짹 새소리를 내며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한참을 지켜본다. 그들 중 누가 나를 발견하여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면 한 명이, 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이 연달아서 경쟁을 하듯 목청을 높여 '안녕하세요?'를 한다. 누구도 경계하지 않는 그들의 천진함에 전염이 되어서 나도 '안녕하세요?' 인사를 한다. 어지러운 세상에도 이렇게 웃게 하는 존재들이 있구나.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오기도 한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존재들의 까르륵 소리 때문에 나는 가던 길에서 한참을 멈춰 선다.




처음엔 단지 몸을 좀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선량한 이웃들과 천진한 아이들 덕에 나는 자주 멈춰 선다. 벤치에서 책을 읽는 노인을 보고 멈춰 서고, 몸이 불편해 지팡이에 의지해서 걷는 중년 여성의 뒤를 속도를 낮추어 조용히 따라 걷는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풍경에 멈추기도 한다. 그렇게 나는 산책길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만나 자주 멈춘다. 왕복 삼십 분 코스를 때로 더 오랜 시간을 들여 걷는다. 그저 걷고, 숨 쉬고, 멈추고 또 걷는다. 오늘도 걷는다. 산책길은 어느새 내 하루의 성소가 되었다. 어제보다 조금 가벼워진 내가, 오늘도 그 길 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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