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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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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일 May 30. 2023

순애(殉愛/純愛)

나와 정아

23.

사실 이번 여름방학 때는, 해야 할 일이 무척 많았다.

가장 먼저 하루에 두 번, 할매가 요리를 할 때 보조역을 맡는 것. 할매는, 요리를 잘하기도 했고, 좋아하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우리 집에서는, 비가 오면 파전을 먹어야 했고, 눈이 오면 단팥죽을 먹어야 했다.

할매는 나에게 보조역을 시키며, 주방에서의 이것저것들을 알려주었다. 올바른 방식으로 칼을 쥐는 법이라던가, 채소의 보관 방법, 똑같이 검은색을 띤 간장들이지만 제각각 사용법이 다르다던가, 불조절을 잘하는 법 같은 것을.

나는 요리에 흥미가 크게 없었던 탓에, 이 시간이 썩 즐겁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할매랑 있는 시간은, 나에겐 무엇보다 소중했으니까.

두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아버지의 회사에 가서, 아버지의 일을 돕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회사에는, 직원들이 20명 정도 있었다. 내가 회사에서 맡은 역할은, 회사 청소와 스무 명분의 커피를 타서 직원들에게 나눠주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내가 커서 이 회사에 들어오려면, 아무것도 없는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늘상 강조하곤 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아버지가 말했던 그 ‘처음’에 대한 연장으로, 매주 일요일마다 가는 회사 등산 모임에 참여하는 것.

축구부를 그만둔 이후로, 운동에 대한 흥미를 모조리 잃어버린 나로서는, 매주 주말마다 등산을 가는 것은, 정말이지 고역이었다. 다른 일에 있어서는, 상당히 관대한 편이었던 아버지는, 회사와 관련되어 있는 일이라면, 전혀 타협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언제나 바쁘셨다. 아버지는, 내가 깨어있을 수 없는 아주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오셨고, 내가 일어나기 전에 출근을 하셨다.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내가 회사로 출근을 하거나, 주말에 등산을 갔을 때뿐이었다. 그나마도 아버지의 얼굴은 스쳐 지나가듯 볼 수 있었지.

나는 아버지가 무섭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는데, 아버지와 대화를 나눌 때면, 무서운 선배와 대화를 하는 것처럼, 반사적으로 높임말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그냥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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