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애(殉愛/純愛)

나와 정아

by 평일

37.

정아와 사귀던 그 해 겨울에는, 눈이 굉장히 많이 내렸다. 적당히 많이 내렸던 게 아닌, 발이 푹푹 빠져서 신발이 다 젖을 정도로.

사실 나는 겨울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성향이 더위보다는, 추위를 훨씬 더 많이 타는 탓도 있었고, 쌓여있는 눈이, 바퀴벌레마냥 끈질기게 녹지 않고, 꾸역꾸역 겨울을 버티는 것 역시도 징그러웠기 때문에 그랬다. 나와는 정반대로 정아는 겨울을 무척 좋아했다.

-하야, 이번 주 주말에 뭐 해?

-딱히 뭐 없는데? 왜?

-눈사람 만들러 가자.

정아의 눈이, 놀이공원에 처음 가 본 어린아이처럼 빛났다

-눈사람? 추운데…

-가자, 응? 응?

정아의 손이 내 얼굴을 포갰다. 정아의 손이 많이 차가웠다.

-알겠어, 알았어. 손이 왜 이렇게 차, 이리 줘.

-당근 가져와.

-당근은 왜? 추우면 카레 끓여 먹게?

-눈사람한테 코 달아줘야지.

눈사람을 만들러 다시 만난 정아는, 두꺼운 옷에 파묻혀서, 펭귄같이 뒤뚱거리며 약속장소로 걸어왔다.

-이거 받아.

정아가 나에게 장갑을 건넸다.

-이게 뭐야? 뭘 이렇게 많이 가져왔어.

-장갑. 나랑 똑같은 거야. 눈사람을 잘 만드려면, 손이 따뜻해야 돼.

-정아야, 어디 히말라야로 등산 가? 이 정도 옷이면, 지금 바로 올라가도 되겠는데?

정아의 머리보다 훨씬 컸던 털모자가, 계속해서 내려왔던 탓에, 정아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대답했다.

-이것 좀 받아줘.

-이건 뭐야?

-삽이랑 초콜릿이랑 코코아… 내가 만든 건, 네가 달다고 할까 봐 두 병 가지고 왔어.

-미안하게…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나는 딸랑 당근 두 개 밖에 안 가지고 왔는데.

-만들어볼까.

아마 두 시간 정도 눈사람을 만들었었나. 처음에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뭉쳤다. 정아가 준 장갑 덕분에, 손이 많이 시렵진 않았다. 그다음으로 한 일은, 눈사람의 눈썹을 달아주는 일이었다. 눈썹은 솔잎으로 달아주었다. 눈은 고민을 하다가 땅바닥에 있던 돌멩이로 달아주었고, 코는 내가 가지고 온 당근으로 달았다. 눈사람을 다 만들고 나서는, 벤치에 앉아서 정아가 가지고 온 코코아를 마셨다.

-뭐야, 내 것도, 엄청 단데?

-어, 이게 너 거다. 미안.

-너무 달게 마시는 거 아니야? 건강에 안 좋겠다.

-우리 엄마랑 똑같이 얘기하네.

-그야, 네가 너무 달게 마시니까…

-눈사람 이름은 뭘로 할까?

-이름도 지어줘야 되는 거야? 어차피 녹아 없어질 텐데.

-헐…

정아가 코코아를 마시다 말고,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농담, 농담.

-하민이 어때?

-왜 하민이야?

-너 성이랑, 내 성 붙여서.

-내년에 만드는 눈사람은 민하로 하자. 그다음 연도에 만드는 건, 하민 2세 그 다다음 연도에 만드는 건 민하 2세. 그렇게 딱 하민 7세 정도까지만 만들자. 그다음엔 말이야

아, 우린 안 되겠구나. 우리의 끝은, 그렇게 좋게 끝날 순 없겠구나.

-응, 나도 좋아. 그렇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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