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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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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일 Jun 30. 2023

순애(殉愛/純愛)

나와 하연

42.

3월에는 많은 것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할매의 건강은, 동물농장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고, 나는 더 이상 병실을 지키고 있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요양사를 고용했다.

나는 최대한 할매를 기쁘게 만들어드려야 했고,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건,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문득 방송부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중에 커서는, 동물농장 같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PD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병실에서 잠을 청할 때면,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병원 침대가 불편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기보다는, 다른 생각들이 마구 떠올라서 그랬다.

할매가 누워있는 저 자리에, 할매가 누워있기 이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누워있었을지를 생각했다. 개중에 몇 명이나, 자신의 발로 걸어서 병원을 나갔을지를 생각했다.

생각이 깊어질 때면, 덮고 있던 담요를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내가 하는 생각들이 새어나가서 정말로 그렇게 되어버릴까 봐 겁이 나서 그랬다. 종교는 없었지만, 담요를 뒤집어쓰고 양손을 모아 기도를 했다.

제발 나에게서 더 이상은 그만 앗아가 달라고, 이제는 버겁다고. 소중한 걸 잃어버리는 상실감은 너무 아프고, 나는 잃어버린 게 너무 많다고. 우리 할매 좀 여기서 꺼내달라고. 밤이 모두 지나갈 때까지 빌었다. 아침이 밝아오면, 할매에게 인사를 했다.

  -아이고, 우리 할매 어제보다 훨씬 건강해 보이는데? 금방 퇴원하겠네.

할매의 입에 있던 보조장치 때문에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내가 이렇게 말하면, 할매는 내 말을 이해했다는 듯이, 눈을 천천히 깜빡여주었다. 말로 하는 대답보다도, 나만 이해할 수 있는 할매의 그런 깜빡임이 훨씬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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