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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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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일 Jul 11. 2023

순애(殉愛/純愛)

나와 하연

51.

철저한 타인이니, 타코야끼니 왜 뜬금없는 이야기를 늘어 놓는지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에게 일어난 이해하기 힘든 일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꼭 짚고 넘어가야만 했다.

사건의 시작은 아침방송을 끝마친 송하연이 부스에서 나오고 나서부터였다.

  -고생했어, 다음 동아리 시간에 보자.

늘 그렇듯, 송하연은 내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고, 묵묵히 자신의 짐을 챙기고 있었다. 나도 내 짐을 챙겨서, 일어났을 때,

  -얘기 들었어. 많이 힘들었겠다.

방송부는 언제나 경쟁률이 높지만, 특히 올해는 아나운서의 지원자 수가 평소의 배를 웃돌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문득 하연이, 그렇게 경쟁자가 많았던 아나운서로 뽑힌 게 납득이 되었다.

  -아니야. 괜찮아, 고마워.

  -고생했어.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야.

간신히 심장에 빗겨 박혔던 하연의 말들이, 이번엔 정확히 심장에 박혔다.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야'라는 말보다 '고생했어'라는 말이 그랬다. 고생, 그렇지 고생. 고생을 해왔지. 알아주지도 않는 고생을, 아무도 모르게.

이어서, 눈물이 떨어졌다. 처음엔 한 방울, 다음엔 두 세 방울, 다음엔 걷잡을 수도 없이 많이.

당황한 하연이, 내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따금씩 감정이 더 큰 폭으로 요동칠 때는, 눈물을 휴지로 닦아주었다. 이상하게, 그럴수록 눈물이 더 쏟아져 나왔다.

하연이 날 깊은 구덩이로 밀어 넣었다. 바닥으로, 밑바닥으로. 축축 한 곳으로, 예전에 소각하지 못했던 감정이 있는 곳으로.

구역감이 밀려왔다. 하연이 날 부드럽게 안아, 등을 토닥거렸다. 나도 하연을 안았다. 구역감과, 울음이 점차 멎어갔다.

  -다 울었어?

  -응.

하연이 팔을 풀어, 나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났다. 나 역시도 하연을 거의 밀치듯, 하연으로부터 물러났다. 상황이 끝나가니, 불현듯 불안해졌다.

  -나 운 거 다른 사람한테, 말 안 해 줄 수 있어?

대답은 짧고, 간결했다.

  -안 할게.

  -고마워.

당시 하연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교복에 싫어하는 사람의 눈물이 묻어서 화가 났을까? 타코야끼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까?

태우지 못하고 남은 감정들은, 의식하지 않고 무시한다면, 그저 그런 불쾌한 것들이지만, 그런 감정들을 꺼내놓고 마주 봐야 한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그늘인 양 서늘하게 다가와, 그림자처럼 부풀고 늘어나며 행복했던 감정들까지 몽땅 토해내라고, 붙잡고 날 이리저리 흔들 것이다. 자기는 그저 그런 불쾌한 것 따위가 아니라고, 머지않아 자길 주위로 그런 음침한 것들이 덩이지고 몸집을 불려 땅을 뚫고 나올 것이라고 경고를 하곤 한다. 그날 하연이는 차가운 모습이 아닌, 내가 보지  못했던, 다른 모습을 내게 처음 보여줬다. 나 역시도, 내가 우는 모습을 할매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처음 보여줬다.

하연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만큼, 나 역시도 하연에게 그만큼의 거리를 둬야 한다. 내 눈 앞에서 그런 감정들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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