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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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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일 Jul 13. 2023

순애(殉愛/純愛)

나와 하연

53.

할매가 없는 집은, 소름 끼칠 정도로 고요했다.

그렇게 느낄 만도 했지. 평소에 할매는 입버릇처럼 혼잣말을 많이 하곤 했으니까. 뉴스에 나오는, 이름 모를 대머리 정치인을 욕할 때나, 좋은 여행지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볼 때, 당신이 좋아하는 요리를 할 때, 청소를 할 때, 군데군데에서.

하지만 정작 그리웠던 건, 할매의 혼잣말이 아니라, 혼잣말을 할 때, 뒤따라오는 소리들이 그랬다. 나 혼자서는 볼일 없는 뉴스 소리와, 요리를 할 때 나는 달그락거리는 소리, 청소기를 돌리는 소리, 양치하는 소리, 코를 고는 소리같이.

사람이 사는 집이라면, 마땅히 들려야 할 '사람 소리'들이, 우리 집에선 좀처럼 날 일이 없었다. 아주 새벽이 되면, 아버지가 집에 들어왔다. 할매가 내는 소리가 집에서 사라진 순간부터,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는 소리가 날 때면, 나는 자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그날은, 유독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일정치 않았고, 어딘가 불편한 듯 헛기침을 잇달아 해대는 걸로 미루어보아, 아버지가 거하게 취했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내 문 앞에서 멈췄다. 방 문이 열렸다.

아버지가 어떤 감정을 업고, 어떤 말들을 입에 담아왔을까에 대한 생각이 들기 전에, 내 입이 먼저 움직였다.

  -아버지, 집에 가정부 좀 고용해 주세요. 돈 많으시잖아요. 저번에 할머니 봐 주시던 그분 일 잘하시던데, 그분으로요.

아버지는 얼큰하게 취한 붉은 눈으로 날 가만히 응시했고, 나는 하던 말을 이어갔다.

  -할머니가 그러시더라고요. 아버지는, 아버지가 할 도리를 다 하고 있으시다고요. 저한테도, 그 아버지 노릇 좀 해 주세요. 크게 어렵지 않으시잖아요.

  - ···그래.

아버지는 짧은 대답만을 남기고, 내 방을 떠났다.

그다음 날부터, 한 공간 안에 아버지의 공간과, 나의 공간이 조금 더 분명히 나뉘기 시작했고, 그다음 주부터는, 할매를 돌보시던 분이, 우리 집으로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짧은 삶을 살아가면서, 그나마 배운 게 있다면, 일어날 일들은 기어코 일어나고야 만다는 것.

의도했다고, 탄을 얻었던 게 아니었던 것처럼.

기도했다고, 할매가 영영 내 옆을 지킬 수 있던 게 아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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