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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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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일 Aug 16. 2023

순애(殉愛/純愛)

나와 하연

76.

  -애들한테는 비밀로 하는 게 좋겠지?

  -글쎄, 근데 뭐 굳이 비밀로 해야되나.

  -얘기 들으면 엄청 충격받겠다. 애들은, 아직도 우리 어색한 줄 알잖아.

  -그건 그렇겠다.

  -나는, 너가 나 싫어하는 줄 알았어.

  -왜?

  -내가 하는 얘기는, 너가 들은 척도 안 했으니까.

  -그건 부끄러워서 그랬지.

  -별 게 다 부끄럽네. 부끄러운 건, 내가 더 부끄러웠지. 안 친했던 사람한테, 안겨서 울기나 하고.

  -우리 그 때 안 친했어?

  -우리 친했어?

  -나는 그런 줄 알았는데.

  -하여튼 부끄러웠어. 너 교복에 눈물자국 묻었을까봐, 걱정도 됐었고.

  -꽤 귀엽다고 생각했었어.

  -난 부끄러웠어. 다른 사람 앞에서 운 게 처음이라.

하연이가 싫어하는 벌레 소리가 들렸다.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노력하면, 되려 다른 자잘한 소리들이 귀 속을 메운다. 먼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오토바이 소리라던가, 누군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소리라던가, 왜인지 매번 화가 나있는 고양이 소리같이.

하연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려할 수록, 벌레 소리가 더욱 들렸다. 공기가 선선해서 기분이 좋았다. 가디건을 입고 나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도 하나 쓸까?

  -뭐를?

  -정자에.

  -벌써 그렇게 부도덕해 진 거야?

  -그렇지는 않고···

  -뭐라고 쓰게?

  -너랑 내 이름이랑, 2018년.

  -우리가 사귄다고 해서 뭔가 크게 바뀔 건 없지 않을까.

  -그렇지. 딱히 크게 바뀔 건 없을 거 같은데.

  -나는 똑같이 너한테 장난 칠 거야. 물론 벌레는 빼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아, 그리고 나는 여보, 자기 같은 호칭 쓰는 거 싫어해. 결혼도 안 했는데, 여보니 자기니 하는 거 오글거려서 싫어.

  -맞아. 완전 오글거려. ‘야’만 아니면 다 좋아.

  -하던 것처럼 이름 부를래. 그게 담백하고 제일 좋은 거 같아.

  -맞아. 나도 그게 제일 좋아.

  -또 원하는 거 있어?

  -음, 무던하게 사귀는 거. 크게 싸우지 말고, 너무 깊게 좋아하지말고. 조금 있으면 고3이니까. 물론 고3 끝나면 그래도 좋아. 기꺼이 허락해줄게.

  -감동인데?

  -너는 원하는 거 있어?

  -나도 마찬가지야. 큰 탈 없이 잘 사귀는 거. 이러니까 무슨 계약하는 거 같네.

  -엄밀히 말하면 계약 맞지.

  -아, 그러면 방금 정자에 쓴 게, 계약서에 서명한 거야?

  -그렇지. 1년마다 계약 갱신이야. 도영씨랑 지원씨처럼.

  -그래, 그러자.

2018년 늦은 봄과 초여름 사이에서 우린 계약서를 쓰는 사이가 됐다. 철저한 파트너 사이에서, 치즈 타코야끼를 나누어 먹는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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