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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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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일 Aug 24. 2023

순애(殉愛/純愛)

나와 하연

82.

할매의 요리 보조를 맡는다던가, 아버지의 일을 도울 필요는 없었지만, 이번 방학에는 어느 때보다도 훨씬 바빴다.

늦게 시작한 공부는 인간관계와 다르게 쉽지 않았다.

쉽진 않았지만, 그닥 괴롭지도 않았다. 공부를 하는 게 나름에 재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탄이 귀신같이 알고 찾아와서 해결해 주고 사라졌으니까.

공부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일 기뻐했던 건, 탄보다도 오히려 하연이였다.

사실 그 이야기를 듣고 하연이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 말은 하연에게 쓸 수 있는 마음이랑 시간이 훨씬 줄어들 예정이라는 말이었는데. 이건 내가 알던 이치와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쓰다'라는 동사는, 돈이나 마음, 시간같이 유한한 명사 뒤에 붙기 마련이고, 그런 유한한 것들을 다른 무언가에게 뺏기는 건 좋지 않은 상황이니까. 강도에게 돈을 뺏기고 좋아하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그렇지 않아 하연아?

  -그건 그렇지.

  -그럼, 너한테 쓸 수 있는 시간이나, 마음이 줄어든대도 괜찮아?

  -응, 그건 괜찮아. 그건 내가 준 거니까.

  -준다는 게 무슨 말이야?

  -시간을 준다는 거지. 너가 공부할 시간을. 너가 나한테 준 것처럼. 너도 나 공부할 때 안 건드리잖아.

  -그치.

  -왜 그랬는데?

  -너한테 공부는 중요하니까.

  -너한테도 이제 공부는 중요하지?

  -응, 이젠 중요해졌어.

  -그럼 나도 줄 수 있어.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네.

  -그럼, 끝없이 줄 수 있지.

하연이 혼자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같이 끄덕거리고 싶어.

  -너는 여자친구 진짜 잘 뒀다. 나 같은 사람 없어. 잘 해.

  -뭐야, 혼자 마음대로 결론짓지 마세요···

  -하여튼 잘 해.

  -너는 내가 그렇게 좋냐.

  -그치. 너도 좋은데, 너를 좋아하는 나도 참 많이 좋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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