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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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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일 Sep 07. 2023

순애(殉愛/純愛)

나와 하연

91.

근데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탄이 사라졌다.

그 말의 뜻은 탄이 메우고 있던 부분이 텅 비어버렸다는 뜻이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없다’는 ‘있다’의 반대말이다. 탄은 ‘있다’라는 말을 좋아했다. 탄이 좋아했기 때문에 나 역시도 그 말을 좋아했다.

지금은 그 반대다. 탄이 없다. 아니, 탄은 있다. 살아있다. 근데 나에겐 탄이 없다. 탄이 없으면 난 어떡하지. 난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어쩔 수 있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쩔 수 있나. 어쩔 수 있나? 방법이 있나? 의미가 있나?

탄과 이어져 있던 연결고리가 끊어져 버리고, 탄은 많은 걸 나에게 남기고 갔다. 그건 빚이나 질병 같은 것들이었다. 하연이는 내 옆에 있었다. 근데 큰 의미는 없었다.

하연이뿐만이 아니었다. 의미가 없었다. 모두 의미가 없었다. 의미를 찾기 위해선 공부밖에 없었다. 사실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하연이는 탄의 존재를 잘 알지 못했다. 내가 탄을 소중히 여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느 정도의 넓이와 깊이로 내가 탄에게 의지하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지 못했다.

그 간극으로부터 내가 하연이에게 미안해야 할만한 일들이 많이 생겨났다.

사실 이건 내가 설명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다. 사실 그건 내가 탄과 나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그랬다.

하연이 가끔 탄에 대해서 물어올 때는, 그냥 친한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물론 ‘그냥’같이 어지간한 마음은 아니었지만,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그냥’밖에는 없었다.

누군가를 좋아할 때, 좋아하는 이유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건 큰일 난 거라고 했는데, 탄이 나한텐 큰일이었다. 3학년에 올라가고, 하연은 달라진 나의 모습에 많은 우려와 걱정을 표시했다. 나는 그저 학업 스트레스 때문이라며 둘러댔지만, 하연이는 눈치가 빨랐다. 무언가 더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알고 있다는 사실을 나에게 티를 내지 않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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