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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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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일 Jan 31. 2024

순애(殉愛/純愛)

나와 순애

1.

눈을 뜨니 대략 12시쯤이었다.

테이블에 식은 음식들이 그대로 있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아무것도 할 생각 없이, 아무것도 먹을 생각 없이. 방의 물건들처럼, 공기처럼 있는 듯 없게, 없는 듯 있게.


2.

억울했다.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잘못한 게 있다고 해도 그렇게 큰 잘못이었나. 그랬다면, 혹시 내가 사과를 하면 받아주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디서 순애를 찾아야할까.

나는 그 사람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데.

어쩌면 정말로 칫솔을 찾으러 오지 않을까?

거짓말을 하던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아니면 내가 보고싶어서?

만약 오지 않는다면, 평생 순애를 볼 수 없다면?

내가 잘 지내라고 했던 말에, 그저 정말로 잘 지낸다면?그럼 너무 억울한데.


3.

이어서 혐오했다.

바짝 말라있는 칫솔을 보며,

더이상 차오르지 않는 넷플릭스 빨간줄에서, 쌓여있는 설거지들을 보며, 물을 주지 않아도 파릇한 다육식물을보며, 옅어져가는 편지위 향수냄새에서,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길쭉한 머리카락들에서.

어쩌면 함께 봤을지도 모를 꽃망울들에서.


4.

마지막으론 차분했다.

학교수업도 잘 듣고, 정말로 친구들과 웃으며 술도 한 잔 하고, 싫어하는 것까지도 어느정도 참아가며 할 수 있을 정도로.

순애를 잊어버려서가 아니었다.

되려 남아 있는 감정이 맑고 깨끗한 혐오뿐이었기에 그랬다. 그래서 이 긴 글을 쓸 수 있었어. 순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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