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하연
91.
3학년이 시작되고, 하연이와 나는 정반대로 반이 갈라졌다. 나는 1반, 하연이는 9반으로. 하연이는 나보다 한층 더 높았던 5층에 교실이 있었다.
3학년 때부터는, 아침 방송 역시도 우리가 진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린 더더욱 의도하지 않는다면 만날 수 없었다. 가끔 쉬는 시간에 너가 우리 반 문 앞을 서성거리는 걸 본 적 있다. 너는 공부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다시 반으로 돌아갔다. 반으로 나가서 잠시 하연이를 볼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던 건 아니었지만 그럴 만한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아마 그때 하연이 반으로 들어와 날 찾지 않았던 건 하연이가 말했던 ‘시간을 준다는 것’이겠지.
그럼에도 하연이는 하교할 때만 되면, 언제나 우리 반 앞으로 와서 종례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창문 너머로 눈이 마주칠 때면, 고개를 빼꼼 내밀어서 날 보고 손을 흔들었다. 종례가 끝나면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고 함께 집으로 터벅이며 걸었고, 지루한 길이 나오면 그것보다 지루한 질문을 했다.
- 오늘은 어땠어?
- 괜찮았어.
- 다행이네.
- 나 안 보고 싶었어?
- 보고 싶었지.
역시 옳고 그름으로 따지자면, 이맘때즈음에 그 아이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게 옳았다.
왜냐면 나에게는 예전처럼 너에게 따뜻하게 굴어 줄 만큼의 여력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알고 있었지만, 알고 있었지만 말이야.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라서,
그런 이기심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탄과 같은 학교에 간다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라는 한 가닥의 희망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래서 공부를 했다. 널 만나서 손을 잡고, 뼈가 으스러질 듯 안고 싶었으니까. 진심으로 그렇게 하고 싶었으니까.
92.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넌 바보 같을 정도로 꾸준했단 말이지.
의미 없는 질문을 매번 던지고, 늘상 똑같이 재미없는 답변을 기다리는 지루한 일을 꽃이 지고, 장마 기간이 지나가고, 나뭇잎이 울긋불긋해질 때까지도 해댔으니까.
그러니까 너는 뭐든 해낼 수 있을 거야. 이렇게 재미없는 일까지도 해냈는걸. 그땐 네가 사랑스러웠던 데다, 자랑스럽기까지 했다니까
93.
- 이젠 너도 학교 끝나면 바로 공부하러 가. 나 기다리지 말고. 이제 수능 진짜 얼마 안 남았잖아.
- 괜찮아.
- 하연아.
- 조금만 있으면 돼.
- 진짜 조금만 있으면 돼.
- 이해하지?
그때부터 하연이는 나와 하교를 함께하는 대신, 언제나 11시쯤이 되면 나에게 같은 내용의 문자를 보내곤 했다.
- [오늘 하루는 어땠어?]
사실 하연의 질문에 진심으로 오늘 하루에 대한 감상을 남겼던 적은 없었다. 내가 [개같았어.] 라고 하거나, [좆같았지 뭐.] 라고 해도, 하연이 이랬던 내 하루를 보상해 줄 순 없으니까. 그래서 난 항상 각져 있는 말들을 보내지.
- [괜찮았지]
- [다행이다. 그래도 내일은 괜찮은 거 말고, 좋았으면 좋겠다.]
이건 하연에 대한 배려이기도 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좋지 않은 감정을 굳이 하연에게 묻힐 필요는 없었으니까. 우리의 대화는 보통은 이런 식이었다.
근데 그날은 하연의 똑같은 질문에, 왜인지 다른 답을 내놓았던 날이었다.
- [오늘 하루는 어땠어?]
- [별로였어.]
- [뭐가 별로였는데?]
- [그냥 기분이]
- [근데 괜찮아 하연아. 이제 진짜 다 끝나 가니까.]
- [마무리 잘 짓자.]
- [그래, 그러자.]
94.
하연이는 이맘때 즈음에 내가 무섭다고 했다.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다고.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미안하다는 말밖에 없었다. 사실 그건 진심이 아니었다. 물론 하연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이 부분에선 아니었다.
하연이가 나에게 가지고 있는 이해심은 빙하만큼 커다랬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너가 날 조금만 더 이해해 줬음 했다고. 이젠 정말 다 끝나 가는데, 조금만 있으면 알아서 네가 알던 나로 다시 돌아갈 텐데. 변한 건 내가 아니라, 내가 처해 있던 상황이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하긴 이기적인 내가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으면서.
95.
수능 전날에는 우연히 시체 같았던 탄을 만났고, 그런 탄을 뒤로하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땐 의외로 밝은 미래를 상상했다. 나와 탄에 대한 생각, 내가 다닐 학교, 미래, 하연에 대한 생각 조금… 조금에서 아주 조금 더, 아주 조금에서 조금 많이 더. 하연이 많이 보고 싶었다.
- [어디야? 얼굴 볼까?]
- [응 그러자.]
어디서 만날지는 굳이 정할 필요가 없었다. 어디에 대한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 둘 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 오랜만이네.
- 그러게 진짜 오랜만이다. 더 예뻐졌네.
- 살 엄청 쪘는데···
- 예쁘기만 한데 왜.
- 그렇게 봐주면 고맙네.
- 고생했어 하연아.
- 고생은 너가 더 많이 했지. 너는 원하는 학교 갈 거야. 진짜 열심히 했으니까.
- 아니 공부말고. 나 말이야.
하연이 픽 하고 웃었다.
- 그건 좀 고생 많았지.
- 혹시 아직도 나 무서워?
- 됐어, 이제.
- 뭐가 됐다는 거야?
하연이 내 손 위로 손을 포갰다.
- 손이 왜 이렇게 거칠어.
- 나도 너 공부할 때 안 놀고, 열심히 했거든.
- 손 줘.
핸드크림을 양껏 짜서, 하연이의 손에 문댔다.
- 나 입술도 많이 텄는데···
- 입술은 하나도 안 텄는데.
- 아닌데, 지금 립밤 안 바르면 금방 피 날 텐데.
- 그렇다고 손으로 발라달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 시험 잘 봐.
- ··· 너도 잘 봐.
96.
됐다. 그건 그냥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된 거였다.
수능이 끝나고, 핸드폰을 받아서 교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탄에게 전화를 건 일이었다. 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시험이 끝난 직후였던 탓에, 탄도 나름대로 정신이 없겠거니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 하연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하연은 전화를 받았다.
- 고생했어, 하연아.
- 응응.
하연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 바로 집으로 갈 거야?
- 모르겠어.
- 맛있는 거 사줄게. 저녁 먹으러 가자.
- 아니야. 그냥 오늘은 집에 갈래.
- 아, 알겠어. 푹 쉬어. 고생했어.
97.
해답을 찾아왔는데, 질문이 사라져 있었다.
인생은 생각보다 단순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인생은 대부분 질문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고,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나에게 그건 자로 잰 듯 의심할 부분이 없는 참인 명제였다.
근데 이번엔 아니었다. 답을 구했지만, 질문이 사라져 있었다. 그럼 난 뭘 한 거지. 뭘 위해서 한 거지. 아 맞아, 그건 탄 때문이었지. 그럼 탄은 어디 갔지? 탄은 사라졌지. 그럼 난 뭘 한 거지. 뭘 위해서 한 거지. 아 맞아, 그건 탄 때문이었는데.
질문이 존재하지 않는 해답엔 아무런 힘이 없다. 그래서 탄은 놓친 풍선처럼 날아가 버렸고, 나는 그런 탄을 어린아이처럼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맘때즈음엔 탄이 꿈에 많이 나왔다. 어떤 날에 탄은 날 저주했고, 그런 난 밤을 자주 새웠다. 며칠 밤을 새면 어딘가 멍한 기분이 든다. 그런 날 잠에 들면, 어김없이 탄이 나온다.
탄은, 내가 자신을 죽였다고. 본인이 이렇게까지 망가지기 전에 잡아 줬어야 했다고. 그걸 못할 거였으면, 자기 아버지라도 내가 잡아 넣었어야 했다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서운 표정으로 날 저주했다. 내가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처럼.
나는 울고 싶은 표정으로 형의 말을 듣다가, 그 말이 끝날 때 즈음이 되면, 나는 같은 말을 하지.
형 말이 전부 맞아. 형은 틀린 말 안 하니까. 그랬어야 했는데. 내가 형한테 기댔던 것처럼, 나도 형이 그럴 수 있게 했어야 했는데. 내가 잘못한 거 아니까, 그런 무서운 표정은 짓지 말자. 오랜만에 보잖아 우리. 많이 보고 싶었던 말이야.
98.
하연이를 다시 마주한 건, 새해 첫날이 다가오던 밤이었다. 하연의 집 앞에서 만나 우린 그 근처를 몇 바퀴 돌며 새해를 기다렸다. 성인이 됐을 때 우린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 새해 복 많이 받아.
- 응, 너도 그래. 성인 된 거 축하해.
- 되게 별거 아니다. 그치.
- 그러게. 성인 되면, 등에 날개라도 돋을 줄 알았는데.
마침 옆에 편의점이 있길래, 맥주를 두 캔 사서, 공원으로 갔다. 우린 배우처럼 만들어 둔 각본에 맞춰 움직였다.
- 걱정하지 마. 잘될 거야.
이건 내가 하연이에게 했던 말이었다.
- 너도 걱정하지 마. 잘될 거야.
이건 하연이 내게 했던 말이었다. 나는 하연이에게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았는데. 그 뒤로는 각자 조용히 남은 맥주를 비웠다. 쓰기만 썼고, 맛은 하나도 없었던 데다가, 목이 따끔거리고, 속만 더부룩했다니까.
- 계약은 다음으로 미루자. 지금은, 우리 둘 다 너무 지쳤으니까. 이런 마음 말고, 기쁜 마음으로 다음에 하자.
- 응, 그러자.
- 집에 들어갈까?
- 응. 그러자 춥다.
99.
하연이와 헤어져서 집으로 가는 길에는 기억을 더듬어 탄이 피우 것과 똑같은 걸로 샀고 그다음으론 골목으로 향해서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 실수로 머리카락을 태울 뻔했고 연기를 뻐끔거리다 잘못 삼켜 폐로 들어가는 바람에 기침을 마구하다 순간 머리가 핑 돌아 골목 벽을 짚었고 올라오는 구역감에 바닥에 침을 몇 번 뱉었고 침을 뱉어도 입에 남아있는 찝찝한 맛에 화가 난 탓에 주저앉아 꽤 오랜 시간을 울었고 추워서 집에 들어갔을 땐 아무것도 없었고 기분은 그냥 그랬고 조금 안 좋았고 사실은 그냥 조금 같은 걸로 포장할 수 없을 정도로 좆같았고. 그래도 앞으로, 앞으로. 앞으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잠시 하다가, 그냥 그렇게 하다가. 그냥 그러다가
100.
비록 원하는 과는 아니었지만, 목표로 하던 학교에는 입학할 수 있었다. 그 즈음에, 우리 동네에서는 이상한 소문 두 개가, 동시에 함께 돌아다녔다. 극성이었던 한 아빠가, 수능을 망친 아들을 때려 죽였다는 소문과, 우등생이었던 한 학생이, 극성이었던 아빠를 찔러 죽였다는 소문이. 하연이를 놓아줘야 할 때가 찾아왔다. 나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으니까.
- [하연아, 우리 그만 만나자.]
정해 둔 목적지 없이 버스를 탔다.
- [어디야?]
- [나 약속 있어서 밖이야. 이제 연락 못 볼 거야.]
핸드폰을 끄고 처음 보는 정류장에 내려서, 이리저리 걸어 다니다, 담배를 피우다. 집에 돌아가는 길을 찾기 위해서 핸드폰을 켰을 땐, 하연이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몇 통 와 있었다.
- [어디야? 얼굴 보고 얘기해.]
- [너 집 앞이야. 얼른 와. 나 추워.]
- [나 아까 집 들어왔어. 너도 그냥 얼른 들어가.]
내렸어야 될 정류장을 지나쳐 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버스가 그다음 정류장에 도착한 후였다. 그 정류장에서 내렸을 때는, 찬바람이 휙 하고 덮쳤다. 코가 막혀 왔다. 하연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 [전화 좀 받아 봐.]
- [나는 할 얘기 다 했어. 얼른 집 가. 추워]
바람이 심하게 불었던 탓에,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고개를 들어 숨을 크게 한 번 내쉬었다. 고개를 들었을 땐, 핸드폰을 보며 하연이 걸어오고 있었다. 하연이는 표정을 잘 숨기지 못했다. 하연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안도감이었는지, 억울함이었는지, 분노였는지 모를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 여기가 너 집이야?
101.
- 너는, 남들이 너를 좋아하게 만드는 법은 잘 알아도, 너 스스로를 좋아하는 방법은 아예 모르는구나.
- 어?
어?
- 안타까워서 그래. 너 말대로 우리는 헤어질 거지만, 나는 너를 여전히 좋아하고 아끼니까.
- 하연아.
- 응.
-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 너는 날 왜 좋아한 거야?
- 와, 내가 널 진짜 많이 좋아하긴 했구나. 눈물이 다 나네.
- 미안해.
- 미안할 필요는 없어. 네 마음이라고 해서, 네가 모두 다룰 수 있는 건 아니니까.
- 그래도 미안해.
- 다정해서 그랬지, 너는 다정하니까. 다정한 사람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
- 아, 그랬구나.
훌쩍이던 하연이 숨을 고르더니,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건 내가 예전에 알고 있었던, 얼음이었다.
- 너는 다른 사람들이 너를 좋아하는 방법은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 이젠 너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
- 다른 사람을 통해서 배우던, 너 혼자서 알게 되던 말이야. 꼭 그렇게 해야 돼.
- ···
- 이해했어?
- 잘 모르겠어.
- 이해 못 했더라도, 그렇게 돼야 해.
- 응, 그럴게.
너는 참 끝까지 그렇구나.
- 나 학교 붙었어. 원하던 과로, 너랑 똑같은 학교.
진짜 다행이다.
- 다행이다.
- 이리 와.
하연이 날 끌어안더니, 품에 안긴 채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너는, 나를 놓친 걸 후회할 거야. 아주 오랫동안 후회하다가, 결국엔 나한테 다시 돌아올 거야. 이건 내가 너한테 보내는 저주야. 내가 널 좋아하는 마음 만큼이나 깊은 저주.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데구르르··· 데구르르··· 흘러가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추웠던 날씨 탓에 얼어버렸는지, 추웠던 날씨와는 다르게 몸이 뜨거웠던 탓에 증발해 버린 건지. 흔적도 없이
102. (나와 하연 / 끝)
예전에 티비 채널을 돌리다가, 영화를 잠깐 본 적이 있다. 영화 분위기로 봤을 때 홍콩 영화였던 거 같은데, 스쳐 지나가듯 봤던 탓에 정확한 기억은 없다. 비가 오고 있었고, 남자 주인공은 반팔을 입고 운동장에 있었다. 조금 추워 보였다. 아니야 추워보이기보단 쓸쓸해 보였지.
그 남자는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만 년으로 하고 싶다고 말했다. 만 년이라니 터무니도 없지. 무엇이든 만 년이라면, 형체도 없이 사라질 거야. 파인애플 통조림이든, 사람이던, 사랑이던.
그러니까, 하연아. 네가 준 편지는 말도 안 된다는 얘기야.
설령 사랑의 유통기한이 만 년씩이나 된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만 년이라는 시간은 흘러서 이미 형체도 없을 우리 앞에 도달할 거니까.
행복하렴. 그나마 만 년 비슷한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서. 그런 사람을 찾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오롯이 너 혼자서라도. 안온하고 행복한 날들을 보내렴.
너는 얼음같이 차가운 사람이 아니잖아.
녹지 않는 것들은, 만년설 꽁꽁 언 빙하 너네 집 냉동실. 에이, 다시 생각해도 냉동실은 억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