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하연
81.
할매의 요리 보조를 맡는다던가, 아버지의 일을 도울 필요는 없었지만, 이번 방학에는 어느 때보다도 훨씬 바빴다.
늦게 시작한 공부는 인간관계와 다르게 쉽지 않았다. 쉽진 않았지만, 그닥 괴롭지도 않았다. 공부를 하는 게 나름의 재미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탄이 귀신같이 알고 찾아와서 해결해 주고 사라졌으니까.
공부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일 기뻐했던 건, 오히려 탄보다도 하연이었다. 사실 그 이야기를 듣고 하연이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 말은 그 아이에게 쓸 수 있는 마음이랑 시간이 훨씬 줄어들 예정이라는 말이었는데. 이건 내가 알던 이치와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쓰다'라는 동사는, 돈이나 마음, 시간같이 유한한 명사 뒤에 붙기 마련이고, 그런 유한한 것들을 다른 무언가에게 뺏기는 건 좋지 않은 상황이니까. 강도에게 돈을 뺏기고 좋아하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 그렇지 않아 하연아?
- 그건 그렇지.
- 그럼, 내가 너한테 쓸 수 있는 시간이나, 마음이 줄어든대도 괜찮아?
- 응, 그건 괜찮아. 그건 내가 준 거니까.
- 준다는 게 무슨 말이야?
- 시간을 준다는 거지. 너가 공부할 시간을. 너가 나한테 준 것처럼. 너도 나 공부할 때 안 건드리잖아.
- 그치.
- 왜 그랬는데?
- 너한테 공부는 중요하니까.
- 너한테 이제 공부는 중요하지?
- 응, 이젠 중요해졌어.
- 그럼 나도 줄 수 있어.
-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네.
- 그럼 그럼
하연이 혼자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나도 같이 끄덕거리고 싶은데.
- 너는 여자친구 진짜 잘 뒀다. 나 같은 사람 없어. 잘해.
- 뭐야, 혼자 마음대로 결론짓지 마세요···
- 하여튼 잘해.
- 너는 내가 그렇게 좋냐.
- 그치. 너도 좋은데, 너를 좋아하는 나도 참 많이 좋아하지.
82.
2학년 여름방학 때는, 나도 그랬고 하연이 역시도 이래저래 바빴던 탓에, 자주 보지 못했다. 하연이를 만날 때면, 우린 언제나 처음 먹어보는 것들과, 처음 가보는 장소들을 갔다. 저번에 만났을 때 먹었던 마라탕이라던가, 마라탕을 먹으러 갔던 홍대에서 처음 해 봤던 방탈출 카페라던가. 처음 해 보는 것들을 같이 할 때, 함께 느끼는 어색함과 무안함이 좋았다.
- 이건 어떻게 먹는 걸까.
- 그러게, 그냥 재료만 덩그러니 있네.
- 다 고르신 거예요?
- 네? 네.
- 이리 주세요.
가게 주인아주머니가 우리가 고른 재료를 가져가셨을 땐, 정말 당황스러웠지. 왜 갑자기 우리 음식을 뺏어가나 싶은 마음으로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너랑 눈이 마주쳤을 때는 함께 조용히 쿡쿡대며 웃었고.
- 어때? 맛있어?
- 으··· 세제 먹은 거 같아··· 너는 입에 맞아?
- 응, 완전 맛있는데?
- 참, 별 음식이 다 있네.
- 봐봐, 세상에는 타코야끼 말고도 맛있는 게 엄청 많다니까.
- 나는 타코야끼면 충분해.
- 아냐, 세상에 얼마나 재밌고 맛있는 게 많은데. 다 해 봐야지.
- 나는 그래도 우리 동네 정자에서 먹는 타코야끼가 제일 좋아.
- 나도 좋아해. 그래도 안 해보기엔 아깝잖아.
- 그런가?
- 같이 하러 다니자.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지만, 음식은 진작에 다 먹고 없었지. 너는 대체 뭐가 그렇게 하고 싶은 게 많은지가 궁금해서.
- 안 해보고, 안 먹어본 거, 다 먹으러 다니자. 나중에 더 커서는, 여행도 많이 다니고. 여름에는 베트남에 가고, 겨울에는 삿포로에 가는 거야. 가서 수영복도 입고, 코트도 입고 여기저기 돌아다니자. 서핑도 하고··· 스키도 타면 진짜 재밌겠다. 여행하다가, 비 오면 비도 맞아보고, 눈도 맞아보고. 아무래도 우박은 좀 아프겠지? 우박은 패스.
- 그때는 술도 마실 수 있겠네. 오뎅에 사케 마셔보고 싶어. 맥주랑 치킨도. 아, 막걸리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막걸리도 마셔봐야겠다. 뭐야 왜 웃어, 별로야?
- 아니, 그냥 너무 먼 미래 같아서.
- 그렇게 멀지도 않았구만 뭘.
응, 알고 있지 하연아. 2년이 긴 시간이 아니라는 것쯤은. 웃었던 이유는, 아무래도 좋을 거 같아서 그랬던 거야. 어딜 가던, 뭘 먹던 마시던 너랑은 아무래도 좋을 거 같아서.
- 아무래도 좋지.
- 그게 뭐야.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거지.
- 아무래도 좋다는 말이야.
- 싫어도 상관없어. 내가 끌고 갈 거거든.
- 그것도 아무래도 좋지.
- 또 능글거린다.
- 다 먹었으면, 일어날까? 또 안 해 본 거 하러 가야지. 방탈출 해 봤어? 나는 안 해 봤는데.
83.
- 우린 어떤 어른이 될까.
- 어른이 될까?
- 되···겠지?
- 안 믿겨.
- 그러니까.
-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는 그런 어른이 된다고?
- 너는 담배 피우면 안 돼.
- 왜 안 돼. 내 친구들은 벌써 몇 명 피우는데.
- 너는 안 돼.
- 스무 살 되자마자, 너 앞에서 피울 거임. 수고해.
- 가위 가지고 와서 자를 거야.
- 이어서 피울 거야.
- 세로 말고 가로로 자를 거야.
- ··· 그건 생각 못 했는데.
- 졌지?
- 응. 졌네.
- 성인 되자마자, 정자에서 맥주 마시자.
- 타코야끼랑?
- 좋지. 근데 영업하시려나.
- 그날 안 하시면, 전 날 사두지 뭐.
- 식으면 맛없는데.
- 의미가 있잖아
- 춥지 않을까?
- 패딩 입고 마시지 뭐.
- 그냥 술집 가는 건 어때.
- 정자에서 마셔야 돼. 재계약하러 가야지.
- 재계약이라고 하니까 웃기네. 축구선수 된 기분ㅋㅋㅋ
- 그런가.
- 재계약 기념사진 같은 것도 찍어야 하나.
- 재계약 기념사진을 찍어?
- 응, 악수하면서 찍던데. 활짝 웃은 채로
- 재밌겠다ㅋㅋㅋㅋㅋ 찍자.
- 후딱 마시고, 오뎅에 사케 마시러 가자. 우리 동네에 가보고 싶은 데 있어.
- 안 믿긴다.
- 그치 뭔가 안 믿겨.
- 그러게.
84.
국어 선생님은 감성적인 면이 있으셨다. 이 시대에 손편지라니. 개학 첫날, 1교시에 들어 있던 국어 시간에 우린 편지를 한 통 써야만 했다.
나는 편지를 쓰는 시간에 다른 공부를 한다고, 편지를 쓰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하연이가 내 곁으로 와서 종이 한 장을 내 책상에 툭 놓고 갔다.
[뾰족한 부분 없는, 내 마음은 0해.
그런 마음을 잘 이어 붙이면 우리 마음은 해. 고목나무로 만들어진 오래된 정자보다도 훨씬 오래, 픽셀 조각들처럼, 끝없이 반복되는 이진수처럼 0,1히,
아무 데서도 팔지 않는 내 사랑은 0원이고, 그걸 다 가지고 있는 너는 영원하겠구나. 영원한 건 없다지만, 영원하다는 말이 아니라면 잘 표현되지 않는 그런 마음도 있는걸.
너랑 나는 영원히 함께하겠네.
언제나 같이 있겠네.]
- 내가 쓴 글 읽어봤어?
- 응, 너 나가자마자.
- 너는 뭐 안 썼어?
- 나는 수학 공부했는데···
- 잘했다.
- 고마워.
- 칭찬 아닌데.
- 멋진 글이던데?
- 너한테 하는 말이잖아.
- 알아, 알아. 저녁에 맛있는 거 먹자. 내가 사줄게. 이번엔 타코야끼 말고 다른 걸로.
- 웬일이야?
- 나라고 뭐, 맨날 타코야끼만 먹는 줄 알아?
- 너 맨날 그렇잖아.
- 영원하지.
하연이 날 째려보더니, 내 팔을 툭 하고 쳤다.
- 그런 데에 영원하다는 말 쓰지 마.
85.
- 아 맞아. 아까 편지에서 이진수 부분 무슨 의미야? 0,1. 나 이해 못 했어.
- 공을 다르게 읽으면 뭐야.
- 영?
- 일은?
- 하나?
- 하나를 영어로 하면?
- 원?
- 붙여봐.
- 영원? 오 뭐야. 너 똑똑하다.
- 고민 좀 했지.
- 그럼 그냥 영원하다고 하면 되지, 왜 굳이 어렵게 공일 한다고 해?
- 부끄럽잖아.
- 별게 다.
구름이 예쁘게 피어 있길래, 구름을 보고 있었다. 구름은 어떤 촉감을 가지고 있을까. 구름은 수증기라던데, 과학적 사실과는 별개로 나는 그걸 믿지 않는다. 분명 갓 나온 떡처럼 말랑말랑할 거라니까.
- 나 좀 봐봐.
말을 듣고, 고개를 하연이 쪽으로 돌렸을 때는, 하연의 얼굴이 앞에 있었다. 이어서 총소리 같은 쪽 소리가 났다.
- 갑자기?
- 갑자기 하고 싶었어.
- 어떤 맥락에서?
- 아무런 맥락 없이.
- 어어 나는 이런 거 처음 해 보는데
- 나라고 해 본 줄 아냐.
- 맞게 한 건가?
- 몰라.
- 별로였어?
- 아니?
- 그럼 됐어.
구름. 맞아, 꼭 구름 같았어.
-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봐.
- 그거 알아?
- 너 큰일 났다.
- 너는 이제 나 평생 못 잊어버릴 거라니까.
- ··· 나도 마찬가지지만
말을 마친 하연이 나른하게 고개를 떨궜다. 그렇게 조금을 있더니, 다시 나를 바라보고선 배시시 웃었다.
- 그렇겠네.
그날 내 세계엔, 오롯이 너밖에 없었는데. 기억에 남을 정도로 아주 예뻤던 웃음과 입술은, 바다랑 구름이랑 태양이나 산소 같은 것들로. 네가 했던 말들은 장마나,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나는 정말로 너가 했던 말처럼 영원히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니까.
86.
일이 어그러지기 시작한 건, 9월 모의고사가 있던 날부터였나.
그날은 기분이 많이 좋지 않았다.
공부에 대한 마음이, 바꿔 말해 탄에 대한 내 마음이 애착에서 집착으로 바뀌었던 건 3학년 때부터가 아니라, 어쩌면 탄의 9월 모의고사가 끝나고부터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집착을 이해하기 쉬운 말로 되풀이하자면, 떼를 쓰는 거다. 원하는 걸 가지게 해 달라고 마구 떼를 쓰고 조르는 거지. 그러니까 무언가에 집착을 한다는 건, 애초에 그건 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집착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되게 비참한 점은, 그렇다는 걸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는 것이겠지.
.
불안했다. 불안함보다는 불길함이라는 단어가 조금 더 적절하려나. 예전에 느꼈던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익숙하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덜 괴롭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87.
집착이라는 단어를 배우기 전에, 나에게 집착이라는 말은 로보트였다.
오래전 나에게 외로움은 '물고기가 된 기분’이라는 문장이었던 것처럼. 사연은 이렇다.
아주 가지고 싶었던 장난감이 있었다. 특별할 거 없이 흔하게 생긴 로봇 장난감이었는데, 그땐 왜 그렇게 그게 가지고 싶었는지. 보자마자 그걸 사 달라고 드러누워서 떼를 썼었지. 그런 면에선 상당히 엄했던 엄마는, 칼같이 날 그곳에 두고 집으로 돌아갔고.
30분 정도를 그렇게 있었나. 엄마가 정말로 나를 두고 갔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가 되어서야, 나는 바지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고 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로봇을 가지고 싶다는 마음이 꺾인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 깊숙해졌지. 엄마랑 마트를 갈 때, 장난감 코너를 지나갈 때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떼를 썼다. 엄마는 끝까지 로봇을 사 주지 않았고. 꿈에 나올 정도로 가지고 싶은 마음이 정점을 찍었을 때, 스위치가 꺼진 것처럼, 그걸 왜 그렇게까지 가지고 싶었는지를 잊어버렸다.
‘집착’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을 담고 있는지 배우기 전에, 어쩌면 나는 그 마트에서 단어의 본질을 먼저 마주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나는 그 로봇을 가질 수 없는걸 처음 바닥에 드러누운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근데 내가 그걸 사랑했던 마음은, 오롯이 사랑하는 마음뿐 아니라, 그걸 가질 수 없겠다는 마음까지도 포함되어 있던 마음이었고,
88.
- 하연아.
- 응?
- 오래오래 행복하게 지내자.
- 뜬금없네.
- 저번에 우리 홍대 갔을 때, 너가 했던 말 있잖아. 안 해 본 거 다 하러 다니자고. 그 대답 지금 하는 거야. 저번에 애매하게 대답했다고 안 좋아했었잖아.
- 너 무슨 일 있구나.
- 이렇게 로맨틱한 상황에서 무슨 일 있냐니.
- 아닌데, 너 뭐 있는데.
- 뭐 없는데. 날씨가 안 좋아서, 그래 보이나.
-
- 대답은 안 해줄 거야?
하연이가 대답 대신 내 손을 꼭 쥐었다. 무언가 부족했는지 날 꽉 껴안았다. 나도 하연이를 꽉 껴안았다. 그땐, 우리 둘 사이에 바람 한 조각 없는 진공 상태인 것 같았는데. 너가 아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힘을 조금 빼야만 했는데 내가 힘을 뺀 만큼 너는 날 더 세게 안았고.
문득 근거 없는 희망이 솟았다. 탄은 원하는 학교에 가겠구나. 대학교에 가선, 그래. 형 말대로 행복만 왕창하겠구나. 나는 그 옆에 있겠구나. 하연이랑은 오랫동안 행복하겠구나. 정자를 낙서로 가득 메울 만큼이나, 어쩌면 너가 써서 줬던 글처럼 영원히. 이 나라 저 나라를 유랑하듯 돌아다니며, 처음 먹어 보는 음식들과 처음 해 보는 것들을 함께하며.
너랑 나는 그렇게 하겠
89.
이후론 꽤나 무던한 하루들을 보냈다. 그 하루들 사이에 탄은 잠깐 없었다.
그건 탄을 위한 것이었다. 탄은 지금 자신의 일을 하기에도 벅차니까. 그런 탄을 만났던 건 수능 전날이었고, 탄의 상태는 무척 좋아 보였다. 수능 당일에는 하연이와 함께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수능이 끝나고, 이번 수능이 굉장한 불수능이었다는 뉴스 역시도 도서관 휴게실에 있던 티비를 통해 함께 보았다.
- 긴장된다.
- 그치.
- 딱 1년 남았네.
- 와, 그 말 들으니까 확 떨린다.
- 괜히 말했나.
- 나도 가고 싶은 학교 생겼어.
- 아 진짜? 어딘데?
- 나도 너가 가고 싶어 하는 학교.
- 우리 둘 다 공부··· 되게 열심히 해야겠네.
- 그러게.
수능이 끝나고, 탄이 원하던 학교 세 개 중, 두 학교를 붙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근데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90.
근데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탄이 사라졌다. 그 말의 뜻은 탄이 메우고 있던 부분이 텅 비어 버렸다는 뜻이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없다’는 ‘있다’의 반대말이다. 탄은 ‘있다’라는 말을 좋아했다. 탄이 좋아했기 때문에 나 역시도 그 말을 좋아했다.
지금은 그 반대다. 탄이 없다. 아니, 탄은 있다. 살아 있다. 근데 나한테는 탄이 없다. 탄이 없으면 난 어떡하지. 난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어쩔 수 있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쩔 수 있나. 어쩔 수가 있나? 방법이 있나? 의미가 있나?
탄과 이어져 있던 전화실이 끊어져 버리고, 탄은 많은 걸 나에게 남기고 갔다. 그건 빚이나 질병 같은 것들이었다. 하연이는 내 옆에 있었다. 근데 큰 의미는 없었다.
하연이뿐만이 아니었다. 의미가 없었다. 모두 의미가 없었다. 의미를 찾기 위해선 공부밖에 없었다. 사실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하연이는 탄의 존재를 잘 알지 못했다. 내가 탄을 소중히 여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떤 넓이와 깊이로 나의 삶 안에 탄이 담겨 있는지는 잘 알고 있지 못했다. 그 간극으로부터 내가 하연이에게 미안해야 할 만한 일들이 많이 생겨났다.
사실 이건 내가 설명을 제대로 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다. 아니 사실 그건 내가 탄과 나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그랬다.
하연이 가끔 탄에 대해서 물어올 때는, 그냥 친한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물론 ‘그냥’같이 어지간한 마음은 아니었지만,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그냥’밖에는 없었다. 누군가를 좋아할 때, 좋아하는 이유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건 큰일 난 거라고 했는데, 탄이 나에겐 큰일이었다. 3학년에 올라가고, 하연은 달라진 나의 모습에 많은 우려와 걱정을 표시했다. 나는 그저 학업 스트레스 때문이라며 둘러댔지만, 하연이는 눈치가 빨랐다. 무언가 더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알고 있다는 사실을 나에게 티를 내지 않을 만큼.
+
- 새해 복 많이 받아.
- 너도 새해 복 많이 받아 하연아.
- 너가 쓸래?
- 아냐, 너가 펜 들고 있으니까 너가 써.
- 그러자,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