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나더 13

나와 순애

by 평일

106. (나와 순애 / 시작)

원래의 예상과 다르게 길어진 글을 써 내려가며, 이따금씩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를 잃어버릴 때가 있다. 아마 내가 너를 예전만치는 떠올리지는 않나 보다. 물론 진작 그걸 원하긴 했지만, 아직 그래선 안 된다. 아직까지 넌 내 기억 속에 오롯이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이름 모를 여러분에게, 내 삶에 대한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이유가, 마찬가지로 이름 모를 여자아이 하나 때문이었다니까.

순애,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순애. 하지만 절대로 가질 수는 없는 순애 때문에.

지금까지 내가 써 왔던 글이 회고였다면, 지금부터 쓸 글들은, 일종의 커다란 사랑 고백이자, 순애에게 보내는 맑고 묽은 저주이다.

물론 네가 이 글을 읽을 일은 앞으로 절대 없겠지만,


107.

제대를 하고, 사회에 나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독서클럽을 찾아다니는 일이었다.

전역을 한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렇게 재미없는 일을 해야만 했던 건, 전역 직전 읽었던 책 첫 장의, 첫 줄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나의 삶은 누군가에게 말하기 두려울 정도로 유약했고, 부끄러웠으니까. 나는 주인공에 빗대어, 나의 부끄러운 삶에 대한 자문을 구해야만 했다.

그건 내 마지막 발악이었고, 절박함이었다. 어쩌면 내 삶도 간신히 합격점에 걸쳐 있지 않을까 하는.


108.

독서클럽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읽어야 하는 책을 읽을 예정에 있는 독서클럽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런 탓에 나는 크리스마스트리에 전구를 달 때쯤에 전역을 하고서, 나무에 전구 대신 꽃망울이 맺힐 때 즈음이 되어서야 간신히 내가 원하던 독서클럽을 찾을 수 있었다.

운 좋게도 집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정기적으로 활동을 진행하는 독서클럽이었다. 가입했던 독서클럽은 이런저런 이유로 마음에 드는 구석이 많았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활동을 한다는 점이 좋았고,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있는 것도 좋았다. 6명 정도로 클럽에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도 클럽 안에서 닉네임으로 서로를 부른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 어··· 안녕하세요. 저는 '동제'입니다.

- 일전에 설명드렸던 것처럼, 저희 독서클럽은 활동 외에 친목 도모 행위는 금지되어 있어요. 이 점 꼭 유의해주시고, 앞으로 같이 좋은 독서활동 이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 아, 네. 그거야 뭐, 잘 부탁드립니다.

- 어··· 오늘부터 저희 새로운 책 들어가 볼게요. 인간실격 읽어볼 건데··· 다들 책은 가지고 오셨나요? 아이고, 순애님은 오늘도 안 나오셨네··· 바쁘신가···

- 한 페이지씩 돌아가면서 읽어볼게요. 동제씨 오늘 처음 오셨으니까 먼저 읽어보실래요?

- 아, 네. "부끄럼 많은 생애를 살았습니다··· "


109.

일상은 따분하고 지루하다. 이런 권태로움이 극에 달할 때면, 이어폰을 꽂고 검정치마 노래를 듣는다.

정작 필요했던 말들은 다- 덮어 두고서

검정치마 노래를 들으며, 치즈 타코야끼를 먹을 때면, 안 좋은 기분들이 잠시나마 안 좋은 날씨가 맑아지듯 한다. 본가를 떠나오고 난 이후로 가장 불편한 점이 있다면, 역시 치즈 타코야끼를 먹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대량으로 사재기를 해서 냉동실에 얼려둘까도 고민했었지만, 그건 내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것에 대한 모욕이란 생각에 그만두었다.

혼잣말이 늘었다. 잘하지 못하는 요리를 할 때나, 그나마 능숙하게 하는 청소를 할 때나. 평소에는 의식을 하지 못하다가, 가끔 내가 혼잣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할 때면, 할매와 내가 닮은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가슴이 조금 아리다. 당신이 습관처럼 짓던 혼잣말이, 당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었을까 싶은 마음이 들어서. 나는 조금 그런 거 같거든

화창한 날씨 덕에 기분은 나쁘지 않네.


110.

- 아, 그럼 앞에 학교 다니시는 거예요?

- 네네.

- 우와··· 공부 엄청 열심히 하셨나 봐요··· 저는 그 옆에 학교 다니거든요.

- 열심히는 안 했고, 잘은 했죠.

- 자존감이 되게 높으시네요. 가끔씩 이렇게 얘기할 때마다, 묻어 나오는 거 같아요. 되게 부럽다.

- 아무래도 그런 편이긴 하죠. 아, 죄송해요 계산.

- 2000원입니다. 아 이거 행사 중이라 음료수 가져오셔야 해요.

- 음료수는 괜찮은데··· 혹시 드실래요?

- 주시면 감사히 먹죠!

편의점에서 나왔을 땐, 서둘러 독서클럽을 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서둘러야만 했다. 활동 시작 20분 전이 되어서야, 오늘이 활동일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탓에, 시간이 무척 촉박했던 이유였다.

- 죄송합니다. 늦었네요.

- 아, 동제씨. 오랜만에 뵙네요. 아직 활동 시작 안 했어요. 아직 몇 분 안 오셔서··· 한 5분 정도만 이따가 시작할까요?


111.

- 순애님은 또 안 오셨네··· 이러면 좀 곤란한데··· 먼저 시작하실까요? 저번이 25페이지까지 읽었으니까 26페이지 읽을 차례 맞나요? 오늘은 파울로님부터 부탁드릴게요.

- 오늘은 여기까지 하실까요? 책 관련해서 따로 이야기 나누고 싶으신 주제 있으시면, 편하게 생각해 오셔도 좋구요. 고생하셨습니다. 다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독서활동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물었다. 짜낼 수 있는 생각을 다 쥐어짜서, 머릿속에 더 이상 물어볼 생각이 없는 멍한 느낌이 좋았다. 봄 먼지 냄새가 났다. 썩 나쁘지 않은 냄새였다. 순애라는 이름이 문득 툭 하고 떠올랐다. 어떤 사람이 그런 촌스러운 이름을 쓸지, 남자일지 여자일지, 어쩌면 나이 지긋하신 할머니가 닉네임의 뜻을 몰라서, 본명을 닉네임처럼 쓰고 있을지도··· 계획에 없던 궁금증이 꼬리를 물었다. 다음번 활동 때는 순애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 쥐고 있던 아이스크림이 녹아서 손에 톡 하고 떨어졌다.

집이 보였다.


112.

주말에는 간만에 본가에 다녀올 작정이었다.

거기에 남아있는 건, 타코야끼 집 밖에 없었지만, 아니 사실은 타코야끼도 남아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무언가 더 이상 견디기 힘든 기분이 들었다.

기차에서 내려서 4년 만에 도착한 우리 동네는 어딘가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걷다 보니 이곳저곳에서 생각보다 많은 부분이 변해있길래, 타코야끼집과 가까워질수록, 거기도 다른 가게들처럼 어디론가 무심히 사라졌을까 싶은 두려움이 커졌다. 아닌 게 아니라, 이만큼 왔을 때면, 저만치 보여야 할 붉은 간판이 보이지 않았거든.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다행히 타코야끼 집은 상호와 간판이 바뀐 채 그대로 있었다.

- 어? 뭐야.

- 안녕하세요.

- 오랜만에 오셨네요?

- 주인 바뀐 줄 알았어요. 앞에 상호랑 간판 다 바꼈길래···

- 이름만 바꿨죠. 좀 촌스러운 거 같길래.

- 아··· 다행이다···

- 잘 지내셨어요? 몇 년 만이야 이게~

- 네, 잘 지냈죠. 사장님은 잘 지내셨어요?

- 그럭저럭 지냈죠. 어휴 이젠 체력이 안 돼서··· 이것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 어, 안 되는데. 평생 하셔야 돼요. 사장님 때문에 다른 집 타코야끼가 맛이 없어요.

- 에이, 뭐 그 정도까지라고

- 진짜예요. 저 서울 올라가서 타코야끼 한 번도 못 먹었어요.

- 기분은 좋네요.

- 혹시 나중에 뭐 이사 가시거나, 장사 안 하실 거면··· 어 잠시만요. 사장님 혹시 종이랑 펜 하나만 빌릴 수 있을까요.

- 네? 네, 앞에 있는 거 쓰세요.

- 이거 제 전화번호인데, 혹시 가게 이사하시거나 장사 더 안 하실 거면 여기로 연락 좀 주실 수 있나요.

- 연락은 왜?

- 접으신다고 하시면 쟁여두고, 옮기신다고 하면 위치를 알아야 찾아가니까요.

- 어우··· 그렇게까지 하신다고? 신경 쓰여서 못 접겠는데?

- 그럼요 사장님.

- 알겠어요~ 간만에 오셨으니까, 몇 개 더 넣어드릴게.


113.

문제는 이걸 어디서 먹냐였다.

가게 앞에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차에, 좋았던 날씨 탓인지, 공원에 가서 청승이나 떨어볼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정자가 있던 자리에 풀이 무성하게 돋아있는 걸로 보아, 하연이와 자주 앉아있었던 정자는 사라진 지 꽤나 오래된 모양이었다. 하긴 사라질 만 하긴 했지, 좀 낡았었어야지.

마음속 한켠에 헛헛한 느낌이 들었지만, 당장은 마음 속보다 배 속이 더욱 허전했기에 급한 대로 옆에 있던 벤치에 앉아서 타코야끼 상자를 열었다.

예전과 다를 것 없는 맛이었다. 시간을 내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다 보니 사장님이 더 넣어준 타코야끼를 제외하고서라도 상당히 많았다. 내 양이 준 게 아니었다. 습관적으로 12알을 시켜버린 탓에 그랬다. 문득 하연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남은 타코야끼를 다시 포장해서 가방 안에 넣었다.

옛날 생각들이 났다. 먼 걸음 한 김에, 정아부터 시작해 볼까.


114.

가장 먼저 찾은 장소는 정아와 걸었던 하굣길이었다.

바뀐 것 하나 없이 여전히 심심한 길이었다.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다음은 정아랑 헤어졌던 영화관 앞 버스정류장, 그다음은 눈 사이에 반지를 묻어두었던 우리 집 앞이었다. 혹시 반지가 그대로 있을까 싶은 마음에, 땅이라도 파볼까 하던 차에 손이 더러워질까 해서 그만두었다.

다음은 자연스럽게 탄이 담배를 피우던 골목이었다. 사실은 기대였다.

상호가 바뀌어도 맛과 감동은 그대로인 타코야끼집처럼,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해 있어도 예전에 내가 알던 탄이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종류의,

바뀐 것 하나 없이 조용한 골목이네. 문득 배가 고팠다. 얼른 집에 가고 싶었다.


115.

아무래도 기차나 버스를 탈 때면, 창가 쪽 자리를 선호하는 편이다.

빠르게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기차가 터널에 들어갈 때면, 우두커니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피사체가 보인다.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지만, 결국 마주치고야 말 것이다.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하겠지. 내 눈, 눈 옆에 있는 점, 코와 입술.

점만 한 생각이 물방울처럼 툭하고 떨어진다. 파동처럼 잔잔히 퍼진다.

사실 썩 나쁘지 않은 현재 내 상황에서, 나는 무엇이 그렇게 불안하고 공허한지, 마음이 편치 않은지.

하연이를 그렇게 보냈으면 안 됐나, 정아한테 더 솔직했어야 했나, 닫힌 탄네 집 문 초인종을 부서져라 눌러댔어야 했나. 난 왜 모든 걸 망치는지, 왜 다 망가져버리는지. 왜 나만 엉망진창인지.

나만 그런 게 아니라면, 건너편에 앉아있는 저 여자도 사실은 엉망진창이지만, 의연한 척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럼 나도 괜찮은 건가.

이야기를 할 사람이 필요했다. 아니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독서클럽에 더욱 집착을 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에게도 물어본 적 없었던 내 삶을, 다른 사람의 삶인 양 나의 삶에 대한 질문들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긴다는 점에서.


116.

늦은 시간에 집에 도착해서는 간만에 깊은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는 간만에 대청소를 하며, 쓸모없는 물건을 몽땅 버렸다. 버려야 할 물건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양이 상당했던 탓에 시간이 배로 걸렸다.

물건을 한 트럭 버리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라면을 끓였다. 어제 포장해 온 타코야끼와 함께 곁들여 점심을 먹었다. 김치도 함께 먹었으면 좋았겠지만, 김치가 다 떨어지고 없었다.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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