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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Jan 30. 2024

마음을 쓴다는 것

『소심해서 좋다(왕고래)』

  우연히 마주친 내 얼굴에 적잖이 놀랐다. 거울을 너무 오랜만에 본다는 사실에 처음 놀랐고, 수분을 잃은 오징어가 썩은 미역을 걸치고 있는 듯한 몰골에 한 번 더 놀랐다. 이대로 방치하다간 날 마주하는 사람들의 기분까지 해칠 것 같아 큰맘 먹고 근처 미용실을 찾아갔다. (중략) 미용사로서의 최소한의 태도나 역할도 결여된 느낌이었다. 결정적으로 두 눈에 중화제 테러를 당해 한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불편했고, 불쾌했고, 황당했다. 하지만 그 장면에서 뭔가 말하진 못했다. 썩은 미역이 드센 넝쿨로 변한 것을 확인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이 머리로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했지만, 미간 근육을 미세하게 움직이며 조금이나마 불만을 전달한 게 전부다. 돈을 내고,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집으로 왔다.
- "소심해서 좋다(왕고래)", '하고 싶은 말은 한다' 중(236-238쪽)


  작가의 경험을 읽으며 맛깔난 표현력에 웃으면서도 나 역시 그랬던 적이 있어 안타까움과 동질감이 느껴졌다.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새로 한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건 미용사의 실력이 아니라 내 얼굴의 문제인 거겠지,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공손히 인사하고 나오던 무거운 발걸음. 오랜만에 기분 전환을 하고 싶어서 비싼 값을 지불하고 세 시간 넘게 시간을 들였던 건데 머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더 울적해졌던 경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얘기해 봤자 달라질 것이 없고 괜히 불편한 분위기가 만들어질까 봐 별다른 얘기를 하지 못했던 씁쓸함이 책에 그대로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이들도 나와 같은 마음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위안이 된다. 나만 할 말을 제대로 못 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이 상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던 게 아니라는 것, 동료에게 인사하는 출근길에서, 누군가와 눈을 맞추고 대화할 때, 점원이 뭔가 도와주려고 할 때, 약간의 친분이 있는 지인과 이야기를 계속 나누어야 할 때, 다른 누군가도 마음과 에너지를 쓰고 방전되기도 한다는 것에 위로를 받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이 다행스럽고 든든하게 느껴졌다.



  이 책의 제목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소심해서 좋을 건 뭔가 하는 것이었다. 소심함이란 나에게 뜯어고치고 싶은 부족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내향인과 같은 그럴싸한 말로 포장하지 않고 '소심인'이라 자신을 칭하는 작가의 의도가 궁금했다. 이 책은 공감에세이가 아니라 소심해서 좋기는 한데 이렇게 해보면 더 좋다는 말로 개선점을 알려주는 자기 계발서는 아닐까 의심해보기도 했다.


  '나는 소심하다', '나는 불안하다'라고 담담하게 고백하는 작가의 말이 처음에는 찌릿찌릿 마음을 후볐다. 소심하다는 말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소심하다는 말은 지나치게 조심스럽고 속이 좁아 전전긍긍하는 불안한 사람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아마 누군가 나에게 소심하다고 한다면, 소심한 나는 발끈하고 말 것이 분명하다.

만약 당신이 소심인이라면, 책을 덮을 때 함께 되뇔 수 있길 바란다.
소심해도 괜찮다, 말고
소심해서 좋다.
- "소심해서 좋다(왕고래)", 프롤로그 중(7쪽)


  프롤로그의 마법이 통했다. 책을 읽고 나서부터 소심한 내가 은근히 멋지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책 한 권을 읽고 낱말이 풍기는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습들을 들여다보고 키워나가면 수잔 케인이나 여준영 대표처럼 강력한 장점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다. 가치를 보존하고 위기를 예방하고 타인에 대해 공감하고 집중하는 것, 자기만의 길을 만들고 사물이나 현상을 꿰뚫는 능력은 소심인이 흔하게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자기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보지 못한 채 갖지 못한 것부러워하고 가지려고 노력한다면 자꾸 힘들고 괴로워질 것이다. 


  어설프고 느리고 아주 작은 자극에도 힘들어져서 괴롭고 울적할 때가 있다. 누군가는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털고 일어날 텐데 왜 나는 그렇지 못할까 자책할 때도 있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작은 자극을 크게 느끼는 덕분에 고요한 시간에 나를 들여다보고 깨달을 수 있고, 세상을 더 넓고 깊게 볼 수 있다. 내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찬찬히 살펴보고, 이것들을 잘 다듬고 키워나가서 조금 더 가볍고 편안한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우리는 자신의 특질을 드러낼 때 가장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 로버트 맥크레, 폴 코스타 주니어



이미지: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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