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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Feb 06. 2024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

『일의 기쁨과 슬픔(장류진)』

  옅은 색 표지가 마음을 끌었다. 은근하고 포근한 이야기이기를 바라면서 내심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 책을 골랐을 수도 있다. 누군가가 겪었을 법한 8편의 단편은 각각의 세계로 나를 끌어당겼다. 

  2,30대의 젊은이들의 이야기여서인지, 읽는 동안 주책맞게 참견쟁이 어른이 되어 버렸다. 아마도 그 잔소리들은 예전의 나에게 하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음 깊은 곳의 이야기를 모른 척 덮어두고 살아가는 것, 눈 옆을 가린 경주마처럼 옆을 보지 못하고 내달리는 것,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괜찮은 척 현실에 안주하는 것을 보면서 그러지 말라고 이래라저래라 간섭하고 있었다. 주인공들이 겪는 현실의 구질구질함과 옹졸함 그리고 질척임이 생생하게 느껴져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현실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동시에 나 또한, 후회의 순간에서 잘 빠져나왔는지 물어보고 있었다.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 원을 내야 오만 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 원을 내면 만이천 원짜리 축하는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 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잘 살겠습니다' 중에서)

  결혼식 준비를 할 때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바쁘고 어렵고 사소한 것들까지 신경 쓸 것이 많아 힘들었던 것 같다. <잘 살겠습니다>를 읽으면서 결혼 준비를 하는 예비 신부의 수고로움과 바쁨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주인공은, 악의 없이 천진한 표정으로 불편함을 끼치는 빛나 언니를 보며 분한 마음을 갖는다. 내키지 않는 식사자리를 하며 청첩장을 건네주지만 정작 언니는 결혼식에 오지 않았다. 언니가 결혼을 할 때는 식사 대접을 하는 대신 책상 위에 청첩장을 덩그러니 놓고 가버렸다. 서운하고 화가 난 주인공은 언니에게 받은 만큼 돌려주려 한다. 축의금과 밥값을 더하고 뺀 후, 언니에게 축의금 대신 '만 이천 원어치'의 선물만 하기로 한다.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아쉽고 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가 그래도 결혼 선물로 받은 만큼의 선물만 덩그러니 주는 건 야박한 게 아닌가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과 어쩔 수 없이 엮이고, 준 만큼 받지 못해 서운해하고, 그러면서도 언니가 잘 살기를 응원하는 주인공의 복잡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잘 살겠습니다'에는 빛나 언니와의 관계뿐 아니라 주인공이 겪었던 불편한 현실도 드러난다. 뛰어난 스펙에도 불구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원하는 업무를 맡지 못하고 뒤로 밀려난 것, 함께 입사한 남자친구와 연봉을 공개하고 그 차이에서 느꼈던 당황스러움, 자신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벽을 두고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 씁쓸하고 안타까웠다. 





  그날 25일, 월급이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거북이알은 유미카드 포인트를 조회할 수 있는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회장의 한마디에 정말로 월급이 고스란히 포인트로 적립되어 있었다. 그 커다란 숫자를 보는 순간, 거북이알은 심장께의 무언가가 발밑의 어딘가로 곤두박질쳐지는 것만 같은 모멸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녀가 내게 물었다.
  "회사에서 울어본 적 있어요?"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회사 생활 십오 년 하면서 한 번도 운 적이 없었거든요. 루바 공연 건 때문에 특진 취소되고, 팀 옮겨지고, 강남에서 판교로 짐 싸서 올 때도 눈물이 안 났어요. 그런데 그 포인트를 보고 있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포인트가 너무 많아서. 너무 막막해서. ('일의 기쁨과 슬픔' 중에서)

  월급을 포인트로 받는다면? 거북이알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지혜는 한 번의 실수(사실은 실수가 아니었지만)로 회장의 미움을 사고 그로 인해 1년 간 월급을 '포인트'로 받게 된다. 회장이 화가 났다고 직원의 월급을 포인트로 지급한다니 그야말로 갑질이다.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를 막막한 포인트를 보면서 지혜가 느꼈을 당황스러움과 모멸감, 수치스러움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럼에도 지혜는 그것에 눌리지 않는다. 포인트를 현금으로 바꾸어서 생활하기로 한다. 현금으로 바꾸는 방법은 중고거래 앱을 사용하는 것. 지혜의 이야기를 들은 안나는 회사로 돌아온다. 안나는 회사에 늦게까지 남아 기다렸던 공연을 예매하고 홍콩 왕복 항공권을 끊는다.


  일이 주는 기쁨과 슬픔은 무엇일까. 포인트를 현금으로 바꾸어가며 살아가는 지혜에게 일의 기쁨과 슬픔은 무엇이었을까. 어릴 적 배웠던 '일'이란 것은 꿈을 이루고 정체성을 찾고 사명감을 가진 원대한 것이었지만, 어쩌면 일의 기쁨은 지혜처럼 필요한 것을 얻거나 안나처럼 가고 싶었던 공연 티켓을 예매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일이 주는 슬픔은 많지만 일이 주는 기쁨은 찾아 나서야 할지도 모른다. 나에게 일이 주는 기쁨을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이번 단편집에서 제일 좋았던 <탐페레 공항>. 'Dear'로 끝이 나는 이 소설이 나를 설레게 했다. 다시 시작하는 것 같아서, 주인공이 쓰는 편지가 어떻게 시작할지 궁금해서 두근거렸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다큐멘터리 PD를 꿈꿨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이리저리 떠밀려 식품회사의 회계팀에 입사하고 4대 보험과 상여금, 연차 같은 단어에 포근함을 느끼며 기뻐한다. 야근하던 어느 날 신입 피디 공개 채용 팝업창을 보고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양식을 채워 넣는다. 예전의 꿈을 떠올라 이끌리듯 이력서를 적었을 것이다. 그러다 자기소개서의 질문에 난감함을 느끼고 노트북을 꺼버린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했던 경험과 그 이유를 기술하시오.'

  나는 알고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후회하는 몇 가지 중 하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애써 다 털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내 안 어딘가에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고, 떼어내도 끈적이며 남아 있는, 날 불편하게 만드는 그것. 내가 그것을 다시 꺼내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꺼내서 마주하게 되더라도 차마 똑바로 바라보기는 힘들 거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탐페레 공항' 중에서)

  주인공은 6년 전, 아일랜드 더블린에 워킹홀리데이를 하러 간 적이 있다. 그때 핀란드의 탐페레라는 작은 도시에서 경유하면서 공항에서 한 노인 '얀'과 만났다. 함께 건물 밖을 산책하고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집주소를 적어주었다. 워킹홀리데이가 끝난 후 그에게서 편지를 받았지만 여러 가지 핑계로 답장을 미루었다. 피하면 피할수록 마음 한 켠에 남아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노인의 편지. 꿈을 잃고 현실에 끌려가던 자신을 마주 보기 힘들었던 건 아니었을까.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우연히 피디 채용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게 되었고, 후회하는 경험에 대해 묻는 질문에 얀의 편지를 다시 읽어보게 된다. 

  주인공은 용기를 내어 편지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고 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Dear. 편지의 시작이 소설의 끝이라니. 다음 내용이 궁금해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어떤 이야기가 적힐까. 자신의 꿈을 응원해주었던 얀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동안 얀에게 답장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편지를 쓰면서 주인공은 어떤 이야기를 건네게 될까. 6년 만에 답장을 받을 얀의 미소가 그려졌다. 동시에 더이상 마음 깊은 곳의 이야기를 외면하지 않고 직면한 주인공의 용기에 잘했다고 격려해주고 싶어졌다. 

  털어버리고 싶지만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는 것들을 마주할 용기가 나는 아직 없다. 꺼내려고 할수록 괴롭고 힘들어져서 그만 덮어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한 번씩, 불편한 그것을 꺼내고 물에 여러 번 헹구고 햇볕에 탁탁 털어 바짝 말려두고 싶을 때가 있다. 나를 닦달하지 않고 용기가 날 때까지 천천히 기다려보려고 한다. 

  '탐페레 공항'을 읽으면서 핀란드에 가보고 싶어졌다. 얀이 알려준 오로라의 모습을 직접 보게 될 날을 기대해본다.


핀란드의 오로라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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