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보 & 이보보 begins
살랑살랑 가을바람 부는 남산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새파란 가을 하늘 아래
울긋불긋 단풍도,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 물소리도
멋질 거예요.
산책하듯 소풍 가듯 즐겁게 오세요.
날 좋은 날, 예쁘게.
김보보 & 이보보
결혼을 준비하던 우리에게 최대의 숙제가 있었으니, 양가 울보 집안의 눈물을 원천 봉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열아홉 살에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아빠를 잃은 신부의 집안이나, 일일연속극만 봐도 온 가족이 눈이 벌게지도록 눈물을 뚝뚝 흘리는 감성 충만 신랑의 집안이나, 남의 결혼식에서도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기는 마찬가지. 아이라이너를 생명처럼 여기는 나로서는, 일생일대의 생방송과 같은 결혼식장에서 판다가 될 수 없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우리의 결혼식 테마는 ‘축제 같은 결혼식, 절대 울지 않아요’로 결정되었다.
PD 출신 신랑과 아나운서 출신 신부의 일생일대 생방송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눈부신 가을 햇살과 솔솔 부는 산바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야외 예식장을 예약하고, 지금이야 흔하지만 당시에는 거의 없던 ‘주례 없는 결혼식’을 기획했다. 눈물 걷어내기는 어렵지 않았다. 예상되는 눈물 포인트는 셋, 신부가 입장할 때 손잡아 줄 아빠가 안 계시다는 것과,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잘 살겠냐는 질문에 염소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순간, 양가 부모님께 절 하고 안아주고 옷고름으로 눈물 찍어내는 순서. 해법은 간단하다. 이 부분, 전부 들어내면 된다.
신랑은 결혼식 이틀 전까지 영상을 만들고 편집했다. 오프닝에 웃음 포인트를 주기 위해 친한 후배와 신랑이 직접 찍은 뮤직비디오의 첫 장면은, <조율>이라는 곡의 패러디 영상으로 “잠자는 이보보 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하고 노래를 부르며 다가가는 후배에게 잠들어 있던 신랑이 뺨을 찰싹 때리며 “불 꺼!”라고 화를 내면, “형, 프러포즈하셔야죠!”하고 암전이 되며 본 영상이 시작되는 식이었다. 후배에게 미안하게도 결혼식 당일에는 영상 재생의 오류로 뺨 맞는 장면만 다섯 번 정도 반복되어서, 큰 웃음이 터졌던 첫 번째 ‘찰싹’ 때와는 달리 두 번째부터는 하객들 사이에서 “헉”, “어머어머”, “아이고 어떡해” 등등의 탄식이 이어졌다. 범상치 않은 결혼식의 시작이었다.
패션쇼에서나 볼 법한 엄청나게 높고 긴 버진 로드가 준비된 곳이어서, 신부 입장은 모델처럼 고고하고 당당하게 혼자 하고 싶었다. 모든 여자 아이들이 꿈꾸듯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아빠 손을 잡고 수줍은 듯 살짝 고개를 숙이고 발그레한 얼굴로 들어서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냐만은, 안 계신데 어쩌겠나, 그렇다고 다른 사람 손을 잡긴 죽기보다 싫었고. 하지만 나의 바람과 달리, 신랑은 신부 혼자 들어서면 괜히 애처로운 마음에 여기저기 눈물 폭탄이 터질 수 있다는 위험 부담을 제기했고, 인정했다. 모델 워킹은 포기, 차선책은 신랑 신부 동시 입장이었다. “신랑 신부 입장!” 같은 멘트는 생략하고, ‘이건 뜬금없는 축가인가?’ 싶은 느낌이 들게 갑자기 등장해 노래를 부르는 두 친구, 후렴구에 모든 하객이 함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할 때 손을 잡고 등장하는 신랑과 신부, 지금까지도 우리 결혼식에 왔던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참 낭만적인 순간이었다. 물론 눈물 폭탄도 무사히 피했고.
염소 목소리로 대답하다 울컥하고 싶지 않아, 방송용 목소리를 장착하고 마이크를 들었다. 신랑 신부가 함께 써 내려간 성결 서약서와 결혼 십계명을 번갈아 읽었다. 주례 대신 존경하는 선배님께 축사를, 오랫동안 힘이 되어 주신 목사님께 축복 기도를 부탁드렸다. 결혼식에서 제일 지루한 파트가 순식간에, 하지만 아름답고 우아하게 흘러갔다. 덕분에 식장에선 얼굴 도장만 찍고 식당으로 돌아서는 하객들이 거의 없었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친구들이 떼창으로 준비해 준 축가 중간에는 신랑이 마이크를 넘겨받아 깜짝 랩을 시도했으나, 영원히 외워지지 않는 가사 덕분에 버벅 버벅 큰 웃음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 순서가 도래했다. 양가 부모님께 인사!
위풍당당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나운서들의 목소리, “지금부터 시상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장한 어머니 상’, 수상자는 오장모 여사입니다. 단상으로 올라와 주시죠.” 깜짝 놀라 휘둥그레진 엄마의 표정,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해 배꼽을 잡은 채 우리 앞에 서셨다.
“위 사람은 타고난 미모를 자랑하는 딸을 낳은 후,
미모에 꼭 맞는 지성과 인성, 영성을 갖출 수 있도록
모범적인 엄마의 모습을 유지하며 고이 돌보아주심으로,
일등 신부로 손꼽히는 오늘날의 김보보를 만들고,
이보보를 ‘귀한 사위‘로 부르며 뜨겁게 안아주셨으므로,
그 은혜에 가슴 깊이 감사드리며 이 상을 드립니다.
딸 김보보, 사위 이보보 드림”
여기저기서 하하 호호 깔깔깔 기분 좋은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아쉽게도 눈물은 피할 수 없었지만, 슬픈 눈물이 아니라 하도 웃어서 터진 눈물이었다. 이어지는 시상식, “다음은 ‘환상의 파트너 상’, 수상자는 이동동 선생과 박이숙 여사입니다. 수상자들께서는 단상으로 올라와 주십시오.”
“두 사람은 30년 간 한 우물을 파 온 성실하고 한결같은 아버지와
쿨한 젊음을 유지하는 다정하고 센스 있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며 언제나 웃음이 가득한 가정을 만듦으로써,
오늘 새 가정을 꾸리는 큰아들 이보보와 며느리 김보보에게 큰 귀감이 되어주셨기에,
그간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이 상을 수여합니다.
큰아들 이보보, 맏며느리 김보보 드림”
여기서 끝낼 우리가 아니다. 시상식의 꽃은 역시 수상소감이지. 미리 준비해 둔 무선 마이크를 들고 사회자가 단상 위로 올라왔다. “양가 어머니, 수상 소감 한 번 들어봐야죠?” 물론, 철통 같은 보안으로 부모님들께는 완전히 비밀로 했던 순서, 준비된 멘트가 있을 리 없다. 그것이 바로 웃음 포인트.
무대 체질인 우리 엄마, 오 여사님께서는 자연스레 마이크를 받아 들고 말씀하셨다. “비록 아빠는 먼저 떠나보냈지만, 저도 우리 신부도 정말 씩씩하게 잘 지내 왔죠? 저 이렇게 딸 잘 키워서 훌륭한 사위 맞이해요, 여러분! 김보보 아빠도 하늘나라에서 잘 보고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다음은 눈에 보이게 오들오들 떨고 계신 무대 공포증 신랑 어머님 차례, 우리와 최고의 호흡을 자랑하는 친구들이자 연륜 있는 아나운서들에게 진행을 맡긴 터라, 눈치 빠르게 질문을 바꾸어 준다.
“우리 어머님께서는 많이 긴장하신 것 같은데, 오늘 맞이하신 맏며느리 자랑 좀 해주세요!”
“아이고, 참. 저 이렇게 앞에서 말을 잘 못하는데...”
분명히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사실 바로 옆에 있던 우리도, 진행자도, 물론 하객들도, 아무도 듣지 못했다. 아마도 며느리 자랑을 기가 막히게 하셨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그때 그 순간을 ‘엄마 모기 빙의 타임’이라 부르며 놀려드리곤 한다.
마지막으로 아이패드를 멋지게 손에 들고 올라오신 신랑 아버님, 가족들을 대표해 하객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순서였다. ‘찬란하게 쏟아지는 가을 햇살 아래’로 시작하는 아버님의 한 편의 시 같았던 아름다운 인사의 첫마디는, 그 날 아침, 아주 긴급하게 수정이 되었다.
그렇다. 모든 것이 기획대로 계획대로 착착 순조롭게 흘러간 것 같은 이 날의 야외 결혼식, 그 날은 새벽부터 하루 종일, 기상 관측 이래 10월 강수량으로서는 거의 최대 수준으로 폭우가 쏟아졌다.
김보보와 이보보, 시트콤 같은 이 부부의 진짜 인생이 시작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