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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제나봄 Oct 12. 2020

설거지론

가정의 평화를 향해 흐르는 남편의 취미생활

결혼하고 8년째, 우리 집의 설거지 담당은 이보보, 남편이다. 그는 식사를 하고 나면 반사적으로 일어나 싱크대로 향하는데, 여기에는 아주 깊고도 오묘한 그만의 철학이 담겨있다.     

 


"설거지는 무조건 남편이 해야 해. 남편이 설거지를 시작하면 아내들은 절대로 앉아있지 않고, 옆에서 그릇의 물기를 닦든 식탁을 정리하든 무언가를 같이 하지. 그런데 아내가 설거지를 시작하면? 99%의 남편들은 어슬렁어슬렁 소파에 드러누워 TV를 켠다는 말이지. 그럼 설거지하는 아내 마음은 부글부글, ‘이놈의 화상, 아 꼴 보기 싫다’ 등등의 마음으로 점철되다가 남편이 방귀라도 뿡 뀌는 순간 같이 빵 터져버린다고. 그러고 나면 ‘왜 먹는 건 같이 먹었는데 치우는 건 나만 치우냐’, ‘하루 종일 일하고 온 남편 힘든 거 안 보이냐’ 이러면서 싸움이 시작되는 게 일종의 코스라고. 우리가 이렇게 10년 가까이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웃기게 살아가는 건, 다 내가 매일매일 설거지를 잘하고 있기 때문이야.”      


이제 일곱 살이 된 딸은 종종 아빠의 보조가 되어준다



아, 구구절절 옳은 말씀. 이 설거지론을 설파할 때면, 대부분의 아내들은 무릎을 탁 치며 격하게 공감하고, 남편들은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는다. “아내 분이 매일매일 맛있는 걸 많이 해 주셔서 그런 거 아닌가요?” 천만의 말씀. 우리 집 요리사 또한 이보보가 된 지 오래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 일을 하는 동안, 내가 창의력을 발휘해 무언가를 창조하는 게 하나도 없는 거야. 글을 쓰고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인데도, 결국은 회사원인 거지. 그래서 회사를 옮겨야 하나 직업을 바꿔야 하나 하다가 어느 순간 요리에 취미가 생긴 거지. 처음엔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보고 인터넷에 올라온 레시피도 따라 해보고 하다가, 점점 식재료에 대한 이해가 생기고, 실패해서 아내한테 수습해달라고 하는 빈도가 줄어들고, 사람들이 내가 한 요리에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크아~’ 탄성을 지르며 맛있게 먹는 모습이 너무 재미있고, 그게 막 행복한 거야. 그래서 요즘은 집에 오는 길에도 ‘오늘은 무슨 요리를 할까’만 생각하면서 와.”      



이쯤 되면 주방을 넘겨 드리는 게 그와 나의 행복을 위해 옳은 일 아니겠는가? 나라고 요리를 싫어하거나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 이게 다 남편의 즐거운 취미생활을 적극 지지하는 차원에서 대인배 같은 면모로 양보하는 것이다. 이건 나에게도 크나큰 희생을 수반하는 것이기도 한데, 남편이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면 빨라야 저녁 7시 반, 간단한 요리를 하더라도 완성해 식탁에 오르기까지 한 시간 남짓, 늦은 시각에 식사를 하면 우리 신체는 참으로 정직하게 먹은 걸 차곡차곡 쌓아 놓고 붙잡고 있기에, 결혼 전에 비해 우리 둘의 몸은 1.5배 정도는 불어났다. 한결 두툼해진 몸의 구석구석을 바라보며 아침마다 다이어트를 결심하지만, 저녁이면 양 손에 제철 식재료를 가득 사 들고 “오늘은 이거 해줄게!” 외치며 들어오는 남편에게 할 수 있는 나의 최고의 사랑 표현은, 두툼해진 턱살과 뱃살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몇 시가 되었든 그가 차려준 저녁상을 맛있게 비우고, 설거지하는 남편 엉덩이를 툭툭 두드려 주며 식탁을 함께 정리하는 것이다. 이게 다 가정의 평화를 위한 거다.      


믿기지 않겠지만 우리집 식탁, 모두 남편의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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